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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1.09 :: 복음과 죄의 본질
2019. 1. 9. 21:27

복음과 죄의 본질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죄에 대한 인식


죄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복음이 복음이 될 수 없다.


복음은 죄인에게 최적화된 말씀이지만, 복음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죄에 대한 인식에 따라서, 복음은 달리 해석될 수도 있다.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하다.


인간 자신이 전적으로 부패한 본질적 죄인이라는 인식은, 자존심이 강한 현대인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개념이다.


본질적 죄인인 인간은, 자신의 본질적 죄를 인식할 수 없는, 근본적으로 죄에 대한 인식 체계가 잘못된 존재이다.


특히나 자신들의 인식 체계를 근거로 철학을 하는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인식 체계가 잘못되어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


자신이 본질적으로 잘못된 죄인이라는 인식은 실존주의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실존주의를 근거로한 현대 신학자들과 이들의 산물인 현대신학은 한결같이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지 않는 현대 신학자들은, 인간의 행동 방식이나 환경의 개선을 통해서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려고한다.


이들은 인간이 죄인인 것은 인정하고있지만, 인간 누구나 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본질적 죄인이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펠라기우스로부터 시작하며, 중세 로마카톨릭 신학자들은 물론, 알미니우스, 슐라이허마허로 이어지는 인본주의 신학자들은 죄의 문제를 외부적 환경의 변화를 통해서 해결하려고한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죄성이 아담으로부터 전가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공동체적 특성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말한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인간의 사회적 속성에서 기인된 것이며,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사회적 속성으로 인하여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분석에 기초한 죄의 문제의 해결책은, 인간의 죄성에 대한 접근보다는, 사회 제도의 개선을 통한 문제 해결 방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인간이 아담의 죄를 전가받았는가에 대해서는 개혁주의와 다소 차이가 있지만, 어거스틴은 모든 인간이 아담의 죄를 유전적(개혁주의에서는 하나님의 강령에 의한 것으로 규정하고있지만)으로 전가받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의지적 선택과 관계없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체질을 가지고있다고 말한다.


아담으로부터 전가된 죄는 피할 수 없는 본질적 죄인 반면에, 외부 환경으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아 짓는 죄는, 인간이 의지적으로 피할 수 있는 피상적인 죄에 불과할 것이다.


인간의 죄악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복음이 제시하는 방법론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죄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 따른 다양한 유형들


성경에서 말하고있는 죄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신학적 유형들이 나타난다.


신앙생활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교회를 교회답게하기 위한 신앙생활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변혁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추구하는 것이다.


사회변혁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사회와 교회와의 관계, 혹은 사회 자체를 어떠한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행동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종교 개혁 이전에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었지만, 종교 개혁 이후에는 다양한 형태로의 분리가 진행되었다.


이원론에 대한 논쟁은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 교회와 세속 사회와의 분리에 따른 성과 속에 대한 논쟁으로부터 본격화되었다.


특히 세속 사회의 분리는 계몽주의와 더불어 더욱 가속화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하나님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쳤던 계몽주의자들은, 하나님을 배제한 문화를 추구하게되었다.


세속 사회의 교회로부터의 분리에 부담감을 갖게된 이들에게는, 교회가 세속 사회와 분리될 것인가, 아니면 세속 사회와 하나가 될 것을 추구할 것인가가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


종교 개혁자들과 청교도 신학자들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변혁보다는 기독론을 기초로한 구원론에 집중하였다.


세속 사회의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에 부담감을 갖게된 이들은 정치와 예술을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세속 사회의 변혁에 관심을 갖게된다.


카이퍼로부터 시작된 신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신론을 기초로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인간의 죄성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사회 변혁을 추구하며, 펠라기우스적 사고로 전환될 수 밖에 없었다.


신론 중심의 개혁주의 신학은 자연스럽게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현대신학자들의 자유주의 신학과 합류될 수 밖에 없었다.


현대신학자들의 신학이 사회 개혁을 추구하는 이들의 신학으로 선택될 수 있었던 근거는, 현대 신학자들이 규정하는 죄의 문제와 이에 대한 해결책이 사회 제도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실례들은 칼바르트와 톰 라이트, 그리고 알버트 월터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사회개혁을 외치는 세계교회협의회(WCC)의 교회론의 기초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는 WCC의 교회론이며, 전통적 교회가 모이는 교회라면, 선교적 교회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흩어지는 교회이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으로 형성된 선교적 교회는, 구원의 최종 종착지를 교회가 아닌 세상에 두고 있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란, 성부 하나님이 선교의 주체되시는 분으로서,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 즉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마찬가지로 성부 성자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교회를 이 땅에 세우셔서 이 땅의 모든 피조물을 대상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다는 개념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모든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선교의 수단으로서의 선교적 교회를 말하는 것이며, 선교의 최종 목적지는 세상이다.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 보는 교회는, 전통적 개념에서의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 속으로 흩어지는 교회이다.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에서의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교회로서, 하나님의 선교의 최종 목적은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하나님 나라 운동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동일하게 세상이라는 목적지를 향하고있다.


톰 라이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개인의 윤리적 삶을 통한 사회 변혁을 추진한다.


새관점에서는 아담의 죄의 전가를 인정하지 않으며, 인간이 본질적으로 죄성을 가진 죄인이라는 개념을 수용하지 않기에, 은혜보다는 인간 스스로의 자력에 의한 변혁을 추진한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카이퍼로부터 시작된 신칼빈주의 기독교세계관과 합류하여 또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해 나아간다.


신칼빈주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대표적 저서인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은, 새관점을 수용한 개정판을 통하여, 모든 영역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카이퍼의 영역주권과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혼합하면서,  문화 구조의 방향 전환을 통한 문화물의 천국보존이라는 문화 변혁을 추구해 나아간다.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와 톰 라이트의 새관점, 그리고 알버트 월터스의 기독교 세계관은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를 통하여 결실을 맺게된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사회변혁을 위한 교회인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는,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와, 톰 라이트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신칼빈주의 기독교 세계관을 종합하여, 포스트모더니즘에 적합화된 이머징 처치의 형태를 갖춤으로서, 교회보다는 사회 변혁을 위한 공동체의 성격을 갖게된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라는 이머징미셔널 처치emerging missional는 Communitas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를 이루어간다.


이머징 처치의 선구자였던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이들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보편사적 학문을 추구하는 판넨베르크의 제자였던 스탠리 그렌츠와, 근원적 혁명의 저자인 존 하워드 요더의 재세례파 사회관을  종합적으로 취합하여 사회 변혁을 위한 이머징 처치를 만들어나갔음을 고백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의 본질적 죄성보다는 사회 변혁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추구하기에, 이들의 신학은 기독론적 구원론보다는 신론 중심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중심이 옮겨질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죄의 문제가 사회에 있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이들에게  인간의 본질적 죄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이제까지 언급하였던 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죄의 문제를 인간의 내부보다는 외적인 환경에 있다고 봄으로서, 사회 변혁을 통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통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인간이 죄를 짓기 이전에 본질적 죄인이냐, 아니면 죄를 지음으로서 죄인으로 규정되느냐에 대한 선택에 따라서, 교회와 신앙 생활의 방향성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노예 의지


인간이 변혁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 자유 의지는 필수적 요소이다.


본인의 의지가 노예 의지라고 한다면, 인간은 사회 변혁을 추구해 나아갈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없다.


공중 권세잡은 자인 사탄에게 종속된 의지로는, 사회는 커녕 자신조차도 변혁시킬 수가 없다.


노예 의지를 가진 이들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필요하다.


노예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어떠한 긍정적 변화도 기대할 수가 없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와 능력이 있다면 은혜가 요구되지 않는다.


능력있는 자에게 복음은 삶의 지침일 뿐이다.


인간이 죄를 짓는 원인이 외적 환경에 있다면, 복음은 외적인 환경을 개선하는 수단일 뿐이다.


하지만 죄를 짓는 원인이 인간 내부에 있다면, 본질적 죄에 대한 해결을 위해서 제시되는 복음은 은혜의 복음이 되어야한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이 이미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자신이 살아있다고 말하는 생명은 육신의 생명일 뿐이다.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을 입고서 하나님과 교통이 가능했으며, 천상의 세계upper-register를 공유했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인간은 비록 육신은 살아있으나, 그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에, 하나님을 향한 긍정적 기대를 할 수 없는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사회적 환경에서 죄의 문제를 찾으려는 이들은 인간 안에 하나님을 향한 긍정적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고 보고있지만, 이러한 견해는 바울의 입장과는 대립된다.


죽은 자의 방향성은, 죄성을 가진 육신의 욕심의 방향성으로 향하여있기에 최종적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


바울은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이 죄인이었던 때의 상태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고 말한다.


육체는 인간이 지니고있는 몸 자체를 말하기에 인간 존재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가 없으며, 인간은 육체의 욕심에 종속되어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할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있다.


이 땅에서 인간은 육체의 노예이며, 육체에 종속된 존재이기에, 육체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노예 의지를 가지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외부의 부정적 환경들은 내부의 부정적 상태가 외부로 드러나 나타난 결과들일 뿐이다.


인간의 내적인 상태에 대한 접근이 없이 외적인 상태만을 변화시키려고하는 것은, 실체를 외면한 현상의 변형만을 시도하는 것이다.


문제에 대한 원인적 접근이 없는 현상적 해결책은 일시적 효과만 있을 뿐, 오히려 근본적 상태만 악화시킬 뿐이다.


문제에 대한 원인적 접근 방식은 본질적 실체 자체를 다루는 것이기에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동물들은 각기 그 본성에 따라서 움직이며, 각기 그 종들의 특성을 드러내면서 살아가듯이, 죄성을 가진 인간의 행동 방식도 본성을 따라가는 동물과 한 가지이다.


개가 개답지 않게 행동할 수 없듯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움직이는 인간은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본질 자체가 죄인인 특성을 드러내면서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개가 개의 특성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가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도 인간의 죄성이라는 특징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종교 개혁자들은 인간의 의지를 노예 의지라고 보았다.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기 이전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성을 지니고있다.



본질적 죄인


사회법에서는 범죄하지 않은 사람에게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회법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법이다.


사회법은 자연법의 한 부분에 속하여있지만, 자연법에는 관습과 양심을 포함한 좀 더 광범위한 내용들을 포함하고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자신이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온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지만, 외적으로 청결함을 자랑하는 바리세인과 서기관들 조차도 자신들이 죄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인간 모두가 자신이 죄가 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본질적 죄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고있는 것이다.


인간은 죄를 짓기 이전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본질적 죄인이다.


갓 태어난 어린 아이라도 하나님의 특별 은혜에 의한 선택이 없다면,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녀임을 알 수 있다.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들의 행동 방식은 어떤 민족보다도 우월한 시민 의식을 보여주는 행동이었지만, 그들의 행동 방식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자신들의 본질적인 악을 가리기 위하여 무덤에 칠하는 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복음에서 다루고자하는 죄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죄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 자체의 죄성에 대한 것이다.


죄악은 현상적 죄일 뿐 실체가 아니다.


실체는 이미 아담 안에서 육신이 된 인간의 본질에 있다.


인본주의, 자유주의 등으로 표현되는 신학적 갈등은 실체인 인간의 본질적 죄를 외면하고 현상으로서의 죄악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행동 방식을 개선하기 위한 것보다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죄인임을 고발하고, 이들을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모으기 위한 것이다.


복음은 단순히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어느 유명한 교회의 목사님은 도덕적인 본을 보여주며 욕심을 내려놓음으로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있지만, 그곳에 모여든 교인들은, 그가 전하는 복음이 도덕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생명이 없는 복음이라는 사실을 인식을 하지 못하고있다.


예수님이 도덕적 본을 보여주신 따름의 대상이라면, 이러한 인물은 인류 역사상 얼마든지 있다.


교회가 도덕적인 타락으로 인해서 사회의 지탄을 받고있는 이유로 인하여, 도덕적인 본을 보여주는 것이 교회의 일차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복음은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죄인임을 고발하고있다.


이는 도덕적인 행동의 유무에 관계가 없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하실 수 있으셨던 것은, 이들이 죄없다 생각하는 바리세인들과는 달리, 자신의 죄를 고백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질적 죄를 가리려는 목적의 도덕적인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신들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길 원하신다.


인간이 본질적 죄인인 것은,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니고는 그 원인을 찾아볼 수가 없다.



죄의 고백


인간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용서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본질적인 죄인임을 고백하여야만 한다.


자신의 본질적 죄를 외면하고 표면적인 죄만을 회개하고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가 없다.


대부분의 현대 신학자들이 말하는 회개를 전제로한 신앙고백은 죄를 지은 것에 대한 고백을 말하고있다.


현대신학자들이 말하는 회개에는 암묵적으로 자신이 본질적 죄인은 아니지만,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를 하나님께 고백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들이 말하는 회개는 바리세인들이 행하려는 선행과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참된 고백은, 자신이 본질적으로 아담 안에서 육신이 되었음을 고백하고, 육신의 소욕을 쫓아서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아담의 죄에 동참한 본질적 죄인임을 고백하여야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지 않고는, 인간에게는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것을 거부하며 살아갈 수있는 능력이 없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누구나 다 자신들이 죄인인 것을 알고있기에, 자신의 죄를 다스리기 위해서 고행을 하거나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적선을 하거나, 선행을 하기도하지만, 이러한 방법으로는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다스릴 수는 없다.


거듭남이 없는 온갖 종류의 수행이나 선행은 또 다른 육신의 소욕의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참된 거듭남은 자신에 대한 주체가 바뀌어야만 한다.


모든 인간에게 아담의 죄가 전가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톰 라이트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습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노력은 바리세인들의 위선과 다름이 없는 악일 뿐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위선적인 하나님 나라일 뿐이다.


인간은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육신을 입고있는 이상 끊임없이 고발되어가는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


고발되어가는 인생에 대한 문제 해결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 밖에 없다.



윤리 도덕과 죄의 본질


다윗은 평생을 자신의 죄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했다.


다윗의 고통은 자신의 육신이 어떠한 죄성을 가지고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심은, 다윗이 깨달은 본질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다윗과 같이 죄의 문제에서 완전하게 해방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죄에 대한 심판에서는 벗어났을지라도,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자신의 육신의 심각한 죄성을 인식하면서 살아가야한다.


성도라고 할지라도 자연법을 초월하여 살아갈 수가 없으며, 초자연적인 삶을 살수도 없다.


그렇다고 성도가 수련을 통하여 자신의 죄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련을 통한 윤리 도덕의 실천은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어느 종교에서나 볼 수 있다.


인간이 아무리 수련과 연습을 해도 그 죄성을 다스리려는 주체는 자기 자신일 뿐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는 없다.


자신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자신을 그리스도께 내어 드려야한다.


거듭난 자는 자신이 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옛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며, 자신의 삶의 주인은 더 이상 자신이 아니다.


성도는 내주하시는 성령이 주장하시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야만 그리스도인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성도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이 될 때, 윤리와 도덕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성도의 삶


윤리 도덕에서 자유하는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대위임령을 수행하는 삶이다.


아담의 좌악으로부터 해방된 성도는 다시 에덴으로 돌아가서 처음 아담에게 주어졌던 명령을 다시 실행하여야 할 의무가 없다.


성도에게 주어진 안식은, 에덴에서의 요구가 성취됨으로 인해서 주어진 것이다.


성도는 타락 이전의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에덴에서의 과제가 완성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선취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에덴에서의 요구는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에덴에서의 요구가 성취된 안식의 나라이다.


그리스도는 안식의 주인으로서, 성도에게 안식이라는 쉼을 주어진다.


성도가 누리는 안식은 에덴에서의 요구에 대한 성취로 인한 것이기에, 에덴에서 아담이 받은 명령을 다시 실행하는 삶은 안식의 삶이 아니다.


성도는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심으로서 이루신 안식을 선포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인간은 죄성을 가진 육신을 입고 있기에 육신으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아담이 받았던 명령을 수행 할 수가 없다.


창세기1장 28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은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종식되었으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


아담이 처음 받았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육신의 소육을 쫓는 사단의 종을 생육하고 번성시킬 수 밖에 없는 체질로의 변화로 인하여, 더 이상 실천이 불가능한 것이다.


성도라 할지라도 죄성을 가지고있는 육신을 입기에, 불가능한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은 문화명령이 될 수 없다.


육신이 된 인간에게, 문화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와같이,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문화변혁운동이 성도의 과제가 될 수도 없다.


아담의 후손들이 마음으로 생각하고 계획하는 모든 것은 항상 악할 뿐이기에, 세상에는 악이 가득할 수 밖에 없으며, 이 땅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을 쌓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자녀를 많이 낳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노아 홍수와 더불어, 노아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인하여 물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듯이,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의 선행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심령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은 진노의 자녀들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러 모으는 생육의 방법이다.


문화 명령을 실행하는 삶은 자신의 죄성을 가리는 또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자신이 본질적인 진노의 자녀임을 외면하고, 문화변혁 운동을 하거나,  도덕을 쫓아가는 사람들은, 아무리 문화를 변화시키고 도덕과 선행으로 자신을 포장한다고 하더라도,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결국에는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모르고, 자신들이 본질적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더 나은 복지 사회와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하나님을 배제하고 사단의 종노릇하는 현대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종국에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심판을 받게 되어있다.


성도의 참된 신앙생활은, 행동 방식의 개선을 넘어서, 본질적인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게 해주는 복음을 전하는 일로 귀결되어야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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