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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 2018. 12. 30. 17:24

아담은 언제 죽었는가?


김원호(dent4834@hanmail.net)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에베소서 2장 1-10절)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이 허물과 죄로 인하여 이미 죽은 존재임을 말하고있다.


그렇다면 에베소 사람들이 모두 다 범죄를 행하였다는 것인가?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을 이미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에베소 사람들이 죄를 범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론적으로 죽어있던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의문을 생길 수밖에 없다.


에베소 사람들은 분명히 살아있는 존재들이다.


그런데도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을 죽은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이는 바울이 말하는 생명에 대한 관점이 일반 상식적인 관점과 다른 것임을 보여준다.


참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사람은 실상은 죽어있는 존재이다.


인간이 의존하는 육신에는 생명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생명이 없는 육신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서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찾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존재와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는 분명 잘못된 상태에 있음에도, 인간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하기를 원치 않고, 그냥 육신의 소욕을 쫓아서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살리셨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죽었던 것이며,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는 것은 인간이 처음 아담과 함께 죽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럼 아담은 언제 죽었는가?


인간은 아담이 늙어 수명이 다 되어 죽었을 때 같이 죽은 것이 아니다.


인간은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하였을 때 죽은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아담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부여된 것은 안식의 성취라는 목표 안에서 완성이 된다.


하나님께서 6일간의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을 취하셨듯이, 아담은 자신에게 주어진 선악과 금령과 통치 명령을 수행함으로서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어야만 했었다.


아담의 불순종은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안식이라는 목표가 상실되었기에, 죽음에 이른 것이다.


에덴 바깥에 있는 모든 인간은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안식이라는 목표가 상실되어있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존재이다.


영원한 안식이라는 목표가 상실된 인간은, 나쁜 짓을 하기 이전에 아담 안에서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이미 목표가 상실된 죽은 존재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아담은 범죄한 날 죽지 않고 수백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아담은 수백년을 살다가 죽었지만, 그는 처음 주어졌던 종말론적 안식을 성취하지 못함으로 죽은 것이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날이 당일이 아닌, 상황을 뜻하는 말이라고 말하면서, 아담이 수백년을 더 살다가 죽었지만, 아담의 육신이 죽은 날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아담이 범죄한 날과 같은 날로 보기도한다.


범죄한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나 에덴 바깥에서 살아갔던 시간을 아담이 살아있던 시간이었다고 말한다면, 육신을 입은 모든 인간도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이렇게되면 에덴 바깥에서의 아담과 우리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이기에, 에베소 교인들을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이들이라는 바울의 말은 틀린 말이 된다.


이러한 혼란은 살아있다는 생명에 대한 규정이 잘못된 데서 온 것이다.


참된 생명은 영원한 안식과 연계되어 규정되어야한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에, 하나님과의 분리는 생명의 상실인 죽음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5:26)”


그리스도의 생명은 순종을 통하여 영원한 안식을 성취하심 가운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생명되신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생명이 없는 자들을 위함이니, 이는 아담 안에서 죽은 이들은 생명이 없는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가식적인 유대인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시면서, 유대인들이 실상은 죽은 존재임을 말씀하신다.


에덴 바깥에서의 아담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육신은 살아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은 자라고 말해야할 것이다.


바빙크는 아담이 범죄한 날 죽지 않고 오랜 시간을 더 살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이러한 언급은 영적인 생명과 육적인 생명을 동일시하는 혼란을 가져온다.


선악과를 먹은 날 아담의 육적인 생명은 보존될 수 있었지만, 영적인 생명은 상실되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은 일차적으로는 영적인 생명이며, 육적인 생명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주요 관심사는 생명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생명을 위한 것이었다.


바빙크가 부차적인 육적인 생명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육신이 살아있었기에 하와의 후손을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원시복음이 이루어질 수 있었음을 말하고자한 것이다.


바빙크는 육적인 생명을 영적인 생명과 일치시킴으로서 혼란을 야기한 것이다.


둘째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되심은, 처음 아담 안에 있었던 생명의 상실에 대한 회복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적인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바빙크가 말하는 범죄한 아담이 에덴 바깥에서 살았던 삶의 기간에 생명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근거로, 인간이 살아있는 존재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화란개혁주의자들이 종교 개혁자들과는 달리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노예 의지에 대하여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은, 바빙크의 생명에 대한 언급을 적용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바빙크가 말하고자했던 것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일정 기간 육신의 삶을 삶으로서,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한 구속이 가능하였던 것에 대한 것이었다.


죽은 자가 후손을 낳는다는 것은 자연법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지만, 죽은 자가 죽은 후손을 낳는 것은 생명이신 하나님의 법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범죄한 아담이 에덴의 바깥에서 죽은 자로서 후손을 낳으며 살아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죽은 자의 후손으로서 죽은 후손을 낳으며, 생명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날 아담과 더불어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죽었다고 보아야지만,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바울의 말이 적용될 수 있다.


인간은 사실상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생명이 있던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이 생명이 없는 육신natural body으로 체질적으로 변화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그들이 육신이 됨으로 하나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으시리라고 말씀하셨다(창 6:3).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아담이 창조 당시에 지음받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이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된 육적인 몸natural body이 되었다는 것이다.


영적인 몸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강령에 따라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으면서 살아왔지만, 육신이 된 인간은 하나님의 강령과 관계없이 자신이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께로부터의 공급과 관계없이 스스로 육신의 소욕을 쫓아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 즉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하늘은, 육신의 눈에 보이는 하늘이 아니라, 육신으로는 보이지 않는 천상의 세계upper-register로서의 하늘이다.


영적인 몸으로 창조된 아담은 에덴에서 천상의 세계를 공유하였으며, 동산에서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에덴은 영적인 몸을 지닌 아담이 하나님의 왕권으로, 제사장, 선지자로서, 피조물에 대한 영적인 권위를 행사하였던 곳이다.


동산에서의 모든 생물들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부여하신 영적인 권위에 복종함으로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있었다.


창세기 1장 28절은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아담에게 위임시키심으로서, 아담이 피조 세계를 어떻게 다스려야하는가를 분명하게 명시한 통치명령, 혹은 지배명령임을 알 수 있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의 해석과 같이, 창세기 1장 28절을 문화명령이나 창조명령으로 해석한다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더불어 성도들의 신앙의 정체성에 대한 전반적인 해석이 달라져야만 한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명령하는 다스림의 대상  가운데에는 "모든 생물"이 포함되어있다.


창세기 3장 1절의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한 자인 뱀은 창세기 1장 28절에서 아담에게 다스리라고 명하신 생물(창 1:28)들 가운데 한 가지였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생물”과 창세기 3장 1절에서의 “짐승”은 동일한 어원을 가진 같은 히브리어 “חַי chay: 살아있는, 생존하는”로서 아담은 분명 왕의 자격으로 간교한 뱀을 다스리라고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것이다.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의 꼬임을 받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이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대적하는 반역자와 더이상 함께 하실 수가 없으셨다.


에덴에서의 아담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함으로서 생명이 있는 영적인 몸을 지닌 자였지만, 범죄하여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생명이 상실된 육신을 지닌 자가 되었다.


이러한 몸의 변화는 생명의 상실, 즉 죽음이었기에, 아담은 범죄한 날 죽은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생명이 있는 영적인 몸은 사탄을 다스리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은 다스려야할 영적 존재에게 다스림을 받게된 것이다.


아담의 영적인 몸은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을 받는 살아있는 몸이었지만, 육신은 그 소욕을 쫓아 사탄의 다스림을 받는 죽은 몸을 뜻하며, 바울은 이에 대하여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허물과 죄로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육신이 되었기에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음으로 인간은 살아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생명이 있는 영적인 몸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종말론적인 안식의 축복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지만,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는 인생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가 없기에, 종말론적인 안식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에덴을 창설하시고 그 곳에 아담을 살게하신 것은 일정 기간의 순종을 통하여 종말론적인 안식에 이르도록하시기 위함이었다.


에덴에서 종말론적인 안식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두 가지 명령을 실행하여야만 했다.


그 두 가지는 선악과 금령과 통치 명령이다.


선악과 금령이 아담에게 최소한의 범하지 말아야 할 수동적 순종을 요구하는 명령이었다면, 창세기 1장 28절의 통치 명령은 종말론적인 안식의 축복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수행하여야 할 능동적 순종을 요구하는 명령이었다.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순종은 아담의 선악과 범죄로 인한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이라는,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수동적 순종을 종결시키신 것과, 아담에게 주어졌던 능동적 순종으로서의 통치 명령을 율법의 요구를 성취시키심으로 모두 완성시키신 것이다.


성도가 전가받는 그리스도의 순종은, 십자가에서 속죄 사역을 감당하신 수동적 순종위 의와 율법의 마침이 되심으로서 이루신 능동적 순종의 의를 전가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의가 성도에게 전가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다.


성도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상실된 생명을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되찾은 것이다.


하지만 비록 성도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다하더라도 아직 체질적으로는 죄성을 가진 육신에서 자유할 수가 없다.


성도에게 주어진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었다면, 성도는 즉각적으로 죄성을 가진 육신에서 벗어나야하지만, 이는 종말론적 약속일 뿐 아직 성취된 것은 아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즉각적으로 인간이 죄성을 가진 육신이 되었지만, 육신을 입은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새생명을 입은 변화된 영적인 몸을 입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모든 인간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담으로 인하여 변화된 죄성을 가진 육신의 유전적 형질이 전가됨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달리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유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속성으로 말미암아, 사회의 집단적 악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개혁주의에서는 하나님의 강령decree에 의해서 인간이 죄인으로 규정됨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담은 범죄로 인하여 이미 체질에 있어서, 땅이 저주를 받은 것과 같이, 영적인 몸spiritual body에서 육적인 몸natural body으로 변화된 것이다.


영적인 몸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 천상의 세계upper-register를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지만, 육신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음으로 인해서, 천상의 세계와 분리된 체질적인 한계를 가진 몸이 된 것이다.


비록 성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존재가 되었지만, 아직 체질적으로는 죄성을 가진 육신을 입고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본다면, 인간의 죄성이 변화된 체질의 유전에 의한 것이라는 어거스틴의 설명도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시기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음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바로 죽음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제7일에 안식을 취하였듯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에덴에서의 순종을 통하여 종말론적 안식에 들어갔어야만 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음은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에게도 주어진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제7일에 안식을 취하신 것과 같이, 인간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안식에 들어가야지만,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생명이 완성되는 것이다.


순종을 통한 영원한 안식이라는 목표가 상실된 인간은 죽은 인간이다.


아담은 불순종하였을 때 이미 종말론적 안식이라는 목표가 상실된 상태이기에, 죽은 존재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명있는 자라고 주장하였을 지라도,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율법을 성취할 수 없는 죽은 자였던 것이다.


생명을 종말론적 안식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볼 때 종말론적 안식이라는 방향성과 이를 성취할 믕력이 상실된 자는 모두 죽은 자이다.


아담의 죄를 전가받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있는 모든 인간은,  종말론적 안식에 들어갈 능력이 상실되었기에, 파멸의 길로 향할 수 밖에 없다.


타락 전 아담에게 있었던 생명은 종말론적 안식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안식의 주인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가받은 성도는, 다시 얻은 생명을 안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생명이 없는 인간의 행위는, 인간이 보기에는 선한 것 같아도, 종말론적 안식에 이를 수 없기에, 하나님보시기에는 악할 뿐이다.


생명이 없는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제는, 자신들이 안식에 이를 수 없는 죽어있는 상태라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하며,  인정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벗어날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때,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하는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안식이라는 생명의 선물을 받으려고 손을 뻗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은 자신이 이미 아담 안에서 죽어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는 영원한 안식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간의 힘으로는 영원한 안식에 이를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영원한 안식으로의 초대이기에, 그리스도가 생명이 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의 결국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었다.


율법 앞에서 이스라엘이 영원한 안식에 이를 수 없는 사실상 죽은 존재임이 증명되었듯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자연법 앞에서 영원한 안식에 이를 수 없는 죽은 존재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율법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유지하기보다는 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였듯이, 하나님의 자연법 앞에 모든 인간은 죽은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이 패망하고나서야 그리스도의 구속의 손길이 다가왔듯이, 인간은 자연법 앞에서 처참하게 죽어있는 모습이 드러남으로서 비로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안식에 다가 갈 수 있는 것이다.


성도가 경험하는 다양한 역경들 가운데에는, 아직 죄성을 가진 육신이 고발되고 그 가운데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담겨있음을 생각해보아야한다.


참된 생명은 그리스도의 안식에 들어갈 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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