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2020. 1. 5. 22:43

하나님은 들짐승을 간교하게 지으셨는가?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들짐승이 왜 간교한가?


창세기3장 1절에서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라고 기록하고있다.


뱀이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들짐승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어느 정도 간교하다는 뜻을 내포하고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들짐승들을 간교하게 지으셨다는 말인가?


간교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악의에 찬 슬기"로 긍정적인 지혜로움보다는 부정적인 의도가 내포되어있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지으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악의가 담겨있는 간교하다는 언어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있다.


특히나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했던 뱀의 역할은 간교함이라는 부정적인 속성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하나님께서 뱀을 간교하게 지으셨기에 결과적으로 아담이 타락할 수밖에 없었던것이 아니냐는 혼란스러움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짐승을 지혜롭게 지으셨지 결코 간교하게 지으시지는 않으셨다.


그렇다면 원래는 간교하게 지으시지 않았는데 아담보다도 먼저 타락하여 간교하게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여기서 들짐승이 왜 간교한 가에 대해서 주목해보고자한다.


들짐승은 말 그대로 들판에 사는 짐승이다.


들판이 의미하는 바는 확트인 벌판으로서 대부분 인적이 드문 야외나 성벽 바깥의 교외 지역을 뜻한다.


들짐승이 사는 들판은 산에 세워진 동산과는 대비되는 곳이다.


산에 세워진 에덴 동산은 산에 세워진 성전으로서 예루살렘과 유사하게 성전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은 바깥 뜰과 명확히 구분되었던 이방인이 들어올 수 없는 거룩한 곳이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동방에 창설하신 에덴 동산은 거룩한 성전으로서 이방인이 머무를 수 있는 바깥뜰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곳이었다.


에덴 동산 바깥의 들판은 성전으로서의 거룩함에 참여되지는 않았지만 에덴의 확장을 위해서 남겨진 구분되는 곳이었다.


에덴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으로서, 에덴에서 아담은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직책을 감당하였으며,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에 선포하고 실행하는 직책을 맡았다.


에덴에 속하여있는 모든 짐승은 창조 목적에 적합한 지혜를 가지고 아담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만 했다.


아담은 에덴 바깥의 모든 지역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종속시키기 위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야했지만, 뱀이 하와를 유혹하였던 당시는 아직 에덴 바깥에 대한 통치를 온전하게 실행시키지는 못하고있었다.


아담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였던 에덴 바깥의 들판에는 아직 아담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며 이곳에서는 사탄의 세력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있었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창세기 1장 28절의 통치 명령은 단순한 통치 영역의 확장이 아니라 에덴 바깥의 동물들을 지배하고있었던 사단의 세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에덴 바깥의 들판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있었던 곳이었기에, 이러한 들판에서 살고있었던 짐승, 즉 들짐승들은 사단에게 종속되어서 간교한 속성을 가지고되었던 것이다.


말씀을 받지 않은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말씀을 맡은 아담의 통치가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에덴 바깥의 들판에서 들짐승들은 사단의 지배 아래에서 간교한 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사단은 분명 하나님이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으셨던 창조 세계에 들어와서 지혜로운 들짐승들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공략하였기에, 들판에 사는 이러한 짐승들은 사단의 영향으로 간교해 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창세기 3장 1절에 들짐승을 사람으로 대입해보면 "누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 중에 가장 간교한 자이니라"라는 문구가 형성된다. 


이럴 경우 하나님께서는 간교한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좋은 사람을 지으셨지만 (후에 사탄의 영향을 받아) 가장 간교한 사람이 되었다는 해석을 할 수 있다.


간교함에 내포되어있는 악은 하나님의 지으심으로부터 기인된 것이 아니라 사탄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에덴 바깥의 들판으로서의 광야


들짐승이 살던 에덴 바깥의 들판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의  광야에 적용해 볼 수 있다.


광야는 적막하거나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서 일종의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땅이다.


에덴 바깥의 들판은 동산을 적신 강이 둘러 흐르면서 동산의 생명력을 공급받아야만 했는데 동산이 폐쇄되면서 주변의 땅들은 더욱 황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에덴에서 하와를 유혹하였던 뱀은 광야의 승리자로 남게되며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의 후손들에게 절대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에덴 바깥은 성전의 바깥을 뜻하며 성전이 없는 모든 곳은 사탄이 지배하는 광야가 되었다.


광야에서의 인간 문명에서 공통적으로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뱀을 미화시킨 용의 모양이다.


역사 속의 용은 전혀 동떨어진 남미의 고대 문명 속에서도 한 가운데 자리잡고있었다.


이는 용에 대한 문명의 교류없이도 아담 안에서 타락한 모든 인류는 뱀의 후손으로서 용을 섬기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문명이 발전된다고 용의 모양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도시문명 또한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용과 관련도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광야라고 할 수 없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 모든 영역은 광야라고 할 수 있다.


광야인 도시 문명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서는 뱀 같은 간교함을 쉽게 볼 수 있으며, 이들은 서로 필요에 의해서만 존재할 뿐, 사랑이 없는 광야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 곳에서는 모든 인간이 에덴의 들짐승과 같이 간교한 모습을 보일 뿐이다.


광야에 사는 짐승들은 사단의 지배하에 간교한 들짐승이 되어 하나님을 대적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도시를 건설하며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가지만 사단은 이러한 도시를 건설하는 인간들을 들짐승들과 같이 간교하게 만들어가고있다.


하나님을 떠난 도시의 인간들이 들짐승들과 같이 간교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간교하게 지으신 것이 아니라 사단의 지배 아래에서 간교해진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권에 도전하는 들판의 짐승들


에덴 주변의 들판은 사단의 영향력이 극대화 되어있었던 곳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으로서의 에덴과 대비되는 곳이었다.


에덴은 예루살렘과 달리 광야로서의 들판과 명확한 경계가 없었다.


성전으로서의 에덴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주변 들판에 사는 들짐승에게도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하나님의 통치권이 선포되어야했기에, 아담과 하와는주변 들판의 들짐승들과 명확한 경계를 두지 않고 접촉할 수 있었다.


하와에게 접근하였던 뱀은 하와를 유혹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뱀을 접한 하와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선포하고 뱀을 지배하여야 된다는 의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뱀과의 만남은 일종의 영적 전쟁이었지만,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여야 한다는 의식이 없었던 아담과 하와는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시기 위해서 아담에게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명하신다.


에덴에서 아담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땅의 모든 곳을 지배할 의무가 있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가장 큰 걸림돌은 들판에서 아담의 통치를 받지 않고 사탄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들짐승들로서, 이들은 간교하게 사단의 종노릇을 하고있었던 것이다.


사탄은 들에 사는 들짐승들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성전인 에덴을 공략하였으며,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가장 간교한 뱀을 이용하여 하와를 유혹하고 결국 아담으로하여금 범죄케함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 것이었다.


에덴에서의 아담과 하와, 그리고 에덴 바깥의 간교한 들짐승과의 싸움은 마치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이스라엘과 우상을 섬기는 주변 이방 족속들과의 싸움과 유형적 유사성을 가지고있다.


이스라엘은 결국 에덴에서의 아담과 마찬가지로 간교한 이들에게 미혹되어 우상을 섬기게됨으로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갈 수밖에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하시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롯한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없이는 사단이 지배하는 광야에서의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눈에 보이는 광야는 하나님의 은혜 바깥에 있는 이들이 어떠한 곳에서 살아가고있는지를 가시적으로 보여주고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삭과 대비되는 아브라함의 종 하갈이 나은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은혜 바깥으로 쫓겨남으로 인해서 광야에 거주하면서 활 쏘는 자가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을 공략하는 간교한 들짐승들


에덴은 안식을 준비하는 곳이었다.


아담이 뱀의 유혹을 물리치고 온전하게 순종하였더라면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고 안식에 이르는 영광을 누렸을 것이다.


하지만 불순종한 아담은 더 이상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없었기에, 안식에 이르는 길로 들어설 수 없었다.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그룹과 두루도는 불칼로 차단됨으로서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는 안식에 이를 수 없게 된 것이다.


광야는 사단이 지배하는 생명이 없는 곳이다.


에덴 바깥으로 쫓겨난 아담은 안식에 이를 수 없었었기에 구원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순종에 따른 축복과 불순종에 따른 저주를 선언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시된 순종과 불순종은 에덴에서 아담에게 정하셨던 선악과 금령의 재연이었다.


뱀을 통하여 하와를 유혹하였던 사탄은 이방 족속들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함으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게 함으로서, 에덴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공략에 성공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하였던 이방 족속들은 간교한 들짐승들과 같이 성전을 공략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마찬가지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다시 범죄한 것은 에덴에서의 아담의 실패를 재연한 것이었으며,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에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범죄한 아담에게 약속하셨던 원시 복음을 실현시키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아담 안에서 범죄한 죄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으며, 자신들이 실상 에덴을 공략했던 광야의 들짐승들과 한 가지가 되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렘 3:2)"라고 말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간교한 들짐승과 같은 아라바 사람들과 한 가지가 되었음을 고발하고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에서 경험했던 광야에서와는 달리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원했으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식탁을 경험하여야만 했다.


광야로 변하여 황폐하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을 기다려야만 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경험할 새 일을 예언하고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9)"


이는 이스라엘의 실상이 광야나 사막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사야의 외침은 광야나 사막이 되어버린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동산으로 회복시키겠다고 전한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 51:3)"


둘째 아담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처음 아담이 실패한 자리로 다시 오셔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서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신다.


회복된 에덴에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안식에 이르는 길이 완성되었다.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회복시킨 에덴은 처음 아담이 있었던 에덴을 넘어서 안식이 성취된 곳이다.


처음 아담은 간교한 들짐승을 이용한 사단의 공격에 패배하였지만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들짐승이 있는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심으로 사탄에게 승리하셨다.



간교함은 오직 사탄의 작품일 뿐이다.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은 실상 광야에 있었던 상태였다.


이들은 더 이상 자신들이 다가오는 간교한 들짐승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례 요한의 외침은 광야에서의 외침이었지만, 자신들이 광야에있는 들짐승들과 한 가지로 간교한 자라는 것을 알았기에 요한의 회개의 외침에 순응하며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세례 요한은 사단의 종으로서의 간교함을 버리고 그리스도께 나아올 것을 선포하고있다.


에덴 바깥의 들짐승들은 사탄의 영향력에 의해 간교한 들짐승이 되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광야에 있는 간교한 자들의 간교함을 없애고 이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다.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신 것은 간교함의 원천이 있는 광야에서 사탄을 대적하심으로 인간 안에 스며든 간교함을 원펀적으로 차단시키고자 함이었다.


간교함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가만히 숨어들어온 사탄이 뿌린 악이다.


하나님께서는 동물들을 보시기에 좋게 지으셨어도 간교하게 지으시지는 않으셨다.


간교한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했던 뱀은 여자의 후손에 의해서 머리가 깨짐으로서 패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창조하신 분도 아니시며, 아담의 불순종을 조장하신 분도 아니시다.


인간 안에 스며든 불순종과 간교함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몰래 숨어들어온 사탄의 작품일 뿐이다.

posted by Wonho Kim
:
전가교리 2019. 10. 7. 13:01

존 페스코가 말하는 전가교리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역자 서문)


전가 교리는 인간의 실존을 설명해주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전가 개념이 없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고민은 답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전가는 인간이 처한 죄악의 근원적 상황을 설명해주는 개념이다.


전가 개념은 신자인건 불신자이건 간에, 모든 인간의 근원적 문제를 설명해주는 실존적 개념이다.


인간의 악은 전가 개념이 없이 설명 될 수 없으며, 인간의 구원은 전가의 개념이 없이 불가능하다.


전가 교리는 신앙고백에 담겨있어야 할 가장 핵심되는 교리이며, 전가 개념이 없는 신앙고백은 모양만 있을 뿐 내용이 없는 형식적인 것이다.


전가 개념이 없는 신앙고백은 구원의 효력이 없는 자기 도취적인 고백일 뿐이다.


전가 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신앙고백을 하는 이들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인식하게 해준다.


전가 교리의 중요성에 비해서, 불행하게도 많은 신앙인들이 전가라는 용어에 대하여 매우 낯설어하며, 새관점주의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현대 신학자들조차 전가 교리를 외면하거나 부정한다.


전가 교리를 부정하는 톰 라이트는 전가라는 용어가 성경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아니라며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시키지만, 이러한 논리는 칭의나 삼위일체 개념도 성경에서 사용되고있지 않는 용어이기에 거부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사람들이 톰 라이트의 수 많은 책들을 보면서 감동을 받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전가라는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으며, 이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도 들어설 자리가 없으며, 그 자리를 사람이 자신의 의를 채워넣어야하는 인간적인 논리일 뿐이다.


칼빈주의 5대 강령의 첫번째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이다.


이는 인간에게 구원을 이룰 만한 능력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가 교리를 부정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전적으로 부패한 무능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자들이다.


신앙고백은 자신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다.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것은 오직 흠이없고 완전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야만 가능하다.


전가교리가 없는 신앙고백은 잘못된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통로가 될 수가 없다.


이번 글에서는 존 페스코가 정리한 전가에 대한 짧막한 글에 대하여 번역을 해 보고자 한다.


출처https://www.wscal.edu/blog/imputation



전가

Imputation


우리가 살아가고있는 매우 개인주의적인 이 세대에, 우리가 다른 이들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생각을 수용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다. 

In the highly individualistic age in which we live, few embrace the idea that we can be held accountable for the actions of others.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그림을 그려주고있다.

But the Bible paints a very different picture.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하여 책임을 물으신다고 가르친다.

The Bible teaches us that God holds us accountable for our own sins.   


이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분명하다(마 12:36-37).

Christ’s words about this are very clear (Matt. 12:36-37). 


그러나 우리도 역시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세상에 연결되어있다.

But we are also connected to the people and world around us. 


사람들은 자신들의 매일의 삶에서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내적으로 연결된 인간 관계를 인식한다.

People unconsciously recognize this intra-human bond in their day-to-day lives. 


우리는 고립된 비누방울에 살지 않는다- 한 사람의 행동은 종종 전체 공동체로 퍼져나간다.

We do not live in isolated bubbles—the actions of one person often ripple throughout an entire community. 


성경은 이러한 관계를 인식하면서 모든 사람이 두 인물, 즉 아담 혹은 그리스도 가운데 하나와 연결되어있음을 설명한다.

The Bible recognizes this relationship and explains the connection that all people have to one of two figures, either Adam or Christ.


사도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의 각자의 대표적인 행동의 영향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기록한다:"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The apostle Paul spells out the implications of the respective representative actions of Adam and Christ: “For as the one man’s disobedience the many were constituted sinners, so by the one man’s obedience the many will be constituted righteous” (Rom. 5:19, trans. mine). 


아담의 하나의 죄는 대표적 행동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하나의 악행을 모든 인류에게 전가, 혹은 모든 인류의 악행으로 여기셨다.

Adam’s one sin was a representative action—God imputed, or credited, his one sinful deed to all humanity. 


역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대표적인 순종을 그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전가시키신다:"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Conversely, God imputes Christ’s representative obedience to all those who believe in him: “Therefore, as one trespass led to condemnation for all men, so one act of righteousness leads to justification and life for all men” (Rom. 5:18). 


이러한 진술들이 전가교리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이다.

These statements constitute the heart of the doctrine of imputation.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 행함들뿐만이 아니라, 아담과 그리스도의 행함 대하여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신다.

God holds us accountable, therefore, both for our own personal actions, and for the actions of either Adam or Christ. 


성경은 다음의 세가지 핵심적 전가를 설명한다: 아담에서 모든 인류에게로, 택함받은 자의 죄를 그리스도께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택함받은 자에게.

The Bible sets forth three key imputations: Adam to all humanity, the sins of the elect to Christ, and the righteousness of Christ to the elect. 


구약과 신약에는 이러한 세가지 전가들을 설명해주는 다수의 성경 구절들이 있다.

There are a number of biblical texts in the Old and New Testament that address these three imputations.


앞에서 기록한 바와같이,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죄를 모든 인류에게 전가시키셨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As noted above, God imputes Adam’s sin to all human beings: “Therefore, just as sin came into the world through one man, and death through sin, and so death spread to all men because all sinned” (Rom. 5:12). 


우리가 세상을 잠깐만 보게된다면, 우리는 이 말이 진리임을 맨눈으로 보게될 것이다.

If we look at the world for a moment, we see the truth of this statement with the naked eye. 


나라, 연령, 사회, 경제력에서 관계없이 모든 이들은 죽음에 종속된다.

People from nation, age, social, and economic class are subject to death. 


예를 들면, 왜 개인적으로 의도적으로 죄를 지어보지도 않은 이들도 죽음에 종속되어야만 하는가?

Why, for example, are subject to death if they have never personally committed a conscious sin? 


간단히 말하자면, 이들도 아담의 대표적인 행동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종속되는 것이다.

Quite simply, they are subject to death because of Adam’s representative action.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범죄인) 실제적 죄와 (아담의 처음 불순종인) 원죄에 대하여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다.

In theological terms, God holds us accountable for actual sin (our own personal transgressions) and original sin (Adam’s first disobedience).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의 죄를 그리스도께 전가시키시고, 그리스도의 의와 순종을 택하신 자에게 전가시키신다.

God imputes the sins of the elect to Christ and Christ’s righteousness or obedience to the elect. 


바울은 이러한 진리를 비법률적 용어로 다음과같이 표현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Paul reveals this truth in non-legal terminology when he writes: “For our sake he made him to be sin who knew no sin, so that in him we might become the righteousness of God” (2 Cor. 5:21). 


바울은 우리가 로마서 5장 19절에서 볼 수 있는 법률적 용어를, 즉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죄인이나 의인으로 "지명"하시거나 "규정"하셨다는 법률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Paul does not use the legal terminology that we find in Romans 5:19, that is, God “appoints,” or, “constitutes” (kathestemi) people as sinners or as righteous.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죄로 삼으셨다고 설명한다.

Here Paul explains that God made Christ sin.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죄를 생성시키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담당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This does not mean that he created sin in Christ; rather, Christ bore it on our behalf. 


반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죄로 삼으심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있었다.

Conversely, God made Christ sin so that we might become the righteousness of God.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 5:17-18)

Paul writes,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new creation. The old has passed away; behold, the new has come. All this is from God, who through Christ reconciled us to himself” (2 Cot. 5:17-18, emphasis, trans. mine). 


오직 믿음이 의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우리에게 전가해주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의를 받게 되는 것이다.

We receive the righteousness of God through the ministry of Christ when God imputes his perfect obedience to us by faith alone.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죄로 삼으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에 의한 같은 방식으로 옮기신 것이다.

The same manner by which God makes Christ sin is the same way he conveys Christ’s righteousness—by imputation.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대한 바울의 근거 본문은, 구약의 속죄의 날에 그 뿌리를 두고있는 예언인 이사야 53장이다.

Paul’s subtext to 2 Corinthians 5:21 is Isaiah 53, a prophecy that has its roots in the Old Testament Day of Atonement. 


이는 최소한 두 가지 이유로 인해서 중요하다.

This is significant for at least two reasons. 


한 가지는 이사야서가 전가를 다루는 본문이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11-12절)

One, Isaiah is a text that deals with imputation: “By his knowledge shall the righteous one, my servant, make many to be accounted righteous, and he shall bear their iniquities . . . because he poured out his soul to death and was numbered with the transgressors” (v. 11-12). 


두번째는, 선지자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셨다"고 말하는데, 이는 속죄의 날에 관한 언어이다. 

Two, when the prophet states that Christ would “bear their iniquities,” this is language from the Day of Atonement. 


대제사장은 속죄 염소에 자신의 손을 얹혀야만 했으며, 이 염소는 죄를 담당하고서 이를 없애야만 했었다.(레 16:22)

The high priest was supposed to lay his hands on the scape goat and the goat was supposed to “bear” the sins and take them away (Lev. 16:22). 


속죄의 날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환상과의 커다란 차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동물이 아닌 자신의 유일한 독생자에게 전가시키셨다는 것이다.

The big difference between the Day of Atonement and Isaiah’s prophet vision of Christ’s crucifixion is that God did not impute our sins to an animal but to his only begotten Son.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의 바울의 진술은 구약에 깊은 근원적 뿌리가 있다.

Paul’s statements in 2 Corinthians 5:21, therefore, have deep taproots into the Old Testament.


전가는, 악을 징벌하는데 있어서 약속을 실행하여야 할 것을 분명하게 해주는 하나님의 신적인 장부에 계산해서 넣어야할 구원에 관한 냉정한 계산에 관한 것이 아니며, 이러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Imputation is not about a cold calculus of salvation where God moves numbers around in his divine ledger to ensure that he gets his pound of flesh in the punishment of the wicked—far from it. 


하나님의 아들은 머나먼 나라로 들어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율법의 형벌의 고통을 당하셨으며, 이로서 우리를 그의 흠없는 의의 옷으로 입히셨다.

The Son of God entered the far country, suffered the penalty of the law on our behalf, and clothed us with his spotless robe of righteousness. 


우리의 맏형의 희생적 사랑으로 인해서 우리는 더 이상 탕자가 아니다.

Because of the sacrificial love of our elder brother, we are prodigals no more. 


우리는 속임수를 써서 하나님의 호의에 들어가려고해서는 안되며, 그보다는 우리의 맏형의 의의 옷을 입고서 하나님의 현존에 담대히 들어감으로서, 우리의 천상의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야한다(슥 3:1)

We do not have to try to swindle our way into God’s favor but rather enter boldly in his presence wearing our elder brother’s coat of righteousness so that we receive the blessing of our heavenly Father (cf. Zech. 3:1ff).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움을 받아야만 하고, 또 우리가 그러하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의 표현이란 말인가(요1서 3:1)?

What wonderful manner of love is this that we should be called, “children of God,” and so we are (1 John 3:1).


존 페스코의 "Death in Adam, Life in Christ:전가교리"는 이러한 주제에 대하여 매우 자세하게 다루고있다.

Dr. Fesko’s book, Death in Adam, Life in Christ: The Doctrine of Imputation, treats this subject in much greater det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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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
언약 2019. 4. 14. 16:49

구속 언약에서의 요구들과 약속들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들어가는 말

 

신구약의 역사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창세 전 구속 언약 안에서 약속되어진 성부 하나님의 요구와 성자 그리스도의 순종하심과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명령과 축복, 그리고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명령과 축복은 그리스도의 순종하심과 이에 따른 상급으로서의 종말론적 안식의 성취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구속 언약은 창조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명령과 축복의 기초와 근거가 된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예비한다.

 

타락 이전에 아담에게 주어졌던 요구와 약속은 창세 전 구속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께 주어졌던 요구와 축복의 모형이었다.

 

아담에게 약속되었던 종말론적 축복은 실체로서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에,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참여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 주어진 상급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축복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직 믿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아담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 주어진 상급을 공유할 수 있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선포되었던 율법은, 아담에게 주어졌던 요구와 축복의 재연이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축복에 대한 예표였다.

 

비록 처음 아담에게는 종말론적 축복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었지만, 처음 아담에게 약속되었던 종말론적 축복은 구속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께 약속된 상급을 통하여 유추해 볼 수 있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명령과 상급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속 언약의 요구 조건과 약속들을 통해서 살펴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존 페스코는 자신의 저서 “The Trinity and the Covenant of Redemption” 136-138쪽에서 구속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께 주어졌던 요구들과 약속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요구들과 약속들

Requirements and promises

 

요구들

Requirements

 

성부는 성자에게 언약의 보증자, 택함받은 자의 언약의 대표자. 그리고 마지막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과 성부께서 성자에게 구속하려고 주신 이들의 죄의 값을 치르도록 요구하셨다.

The Father required of the Son as covenant surety, federal head of the elect, and the last Adam, to make amends for the sin of the first Adam and those whom the Father had given to Him to redeem.

 

성자는 율법을 지키셔서 처음 아담이 행함에 실패한 것을 성취하심으로서, 자신에게 연합된 이들의 영생을 획득하시는 것이었다.

The Son would accomplish what the first Adam failed to do by keeping the law and therefore securing eternal life for those united to Him.

 

구속 언약에는 세 가지 요구들이 약정되어있다.

Three requirements are stipulated in the covenant of redemption:

 

1.성자는 여자에게서나심으로서 인성을 취하시고, 역사 안으로 들어오셔야했다.

1. That the Son would assume human nature by being born of a woman and would thus enter into history.

 

성자께서는 인성을 취하심으로 인간의 (배고픔, 피로등과 같은) 병약함과 연약함에 속박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셨다.

By the Son’s assumption of a human nature He would be subject to human infirmities and weaknesses (hunger, fatigue, etc.) but be without sin.

 

타락한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서는 성자께서 인간이 되시는 것이 필요했다.(갈 4:4-5; 히 2:10-15; 4:15).

In order to redeem fallen humans it was necessary that the Son become human (Gal. 4:4-5; Heb. 2:10-15; 4:15).

 

2. 성자께서는 비록 율법보다 크시지만, 언약의 보증자로서 그는 자신을 율법 아래에 두셨으며, 그렇게 하심으로서 율법에 대하여 자연적이고, 형벌적이고, 언약적인 관계를 가지셨다.

2. Even though the Son is greater than the law, as covenant surety He would place Himself under it, and as such He would have a natural, penal, and federal relation to the law.

 

율법에 대한 그의 자연적인 관계는 그가 사람으로 성육신하신 것으로 인한 것이며; 그의 율법에 대한 형벌적이고 언약적인 관계는 택함받은 자의 언약적 대표라는 그의 신분과 택함받은 이들을 대신해서 자신이 율법의 형벌적 저주를 감당하시겠다는 의지적 자원에 의한 것이었다.(시 40:8; 마 5:17-18; 요 8:28-29; 갈 4:4-5; 빌 2:6-8).

His natural relationship to the law is by virtue of His incarnation as a man; His penal and federal relationship to the law is due to His status as federal head of the elect and His willingness to suffer the penal sanction of the law on their behalf (Ps. 40:8; Matt. 5:17-18; John 8:28-29; Gal. 4:4-5; Phil. 2:6-8).

 

3.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순종과 속죄를 통해서 영생과 죄의 용서에 대한 공로를 얻으시고, 성령께서는, 죄의 용서, 영생에 대한 의와 직함, 그리고 이들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형상으로의 변형이라는 성자의 공로의 열매를 택함 받은 자에게 적용하신다(요 10:16; 16:14-15; 17:12, 19-22;히 2:10-13; 7:25).

3. After Christ had merited eternal life and the forgiveness of sins through His obedience and satisfaction, the Holy Spirit would apply the fruit of His merit to the elect: pardon of sin, right and title to eternal life, and their transformation into the eschatological image of Christ (John 10:16; 16:14-15; 17:12, 19-22; Heb. 2:10-13; 7:25).

 

구원의 서정이라는 의미에서, 성령은 이중 은혜, 즉 불가항력적으로 신자의 영광으로 인도하는, 칭의와 성화라는 이중 은혜의 유익을 적용하신다.

In terms of the ordo salutis, the Spirit applies the benefits of the duplex gratia, the twofold grace of justification and sanctification, which irresistibly lead to the believer’s glorification.

 

약속들

Promises

 

성부는 구속 언약의 충족된 요구들에 따라서, 성자에게 상을 주시겠다는 언약적 맹세를 하신다.

The Father takes a covenantal oath to reward the Son in accordance with the satisfied requirements of the pactum salutis.

 

구속 언약의 성취라는 관점과, 언약의 보증자로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신 성자의 사역에 비추어 볼 때, 성부께서는:

In view of the establishment of the covenant of redemption and in the light of the Son’s Spirit-empowered accomplished work as covenant surety, the Father would:

 

1.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아들을 위한 육신을 준비하시고, 죄는 없게 하셨다(눅 1:35; 히 10:5).

1. Prepare a body for His Son through the agency of the Spirit and uncontaminated by sin (Luke 1:35; Heb. 10:5).

 

2. 성자께서 언약의 중재자로서의 자신의 사역을 실행하실 수 있도록 아들을 필요한 재능들과 은혜들로 준비를 시키셨다. 그러므로 성부께서는 성자를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성령으로 기름을 부으셨는데, 이 약속은 성자의 세례에서 성취되었다 (사 42:1-2; 61:1; 요 3:34).

2. Equip the Son with the necessary gifts and graces in order that the Son could carry out His work as covenant surety. The Father, therefore, would anoint the Son with the Spirit without measure, a promise that was fulfilled at His baptism (Isa. 42:1-2; 61:1; John 3:34).

 

3. 성자의 사역을 지지하고 견고하게 하시고 그를 죽음의 권세에서 구하심으로서, 성자께서 사단의 나라를 깨부수고 자신의 언약의 나라를 세우실 수 있도록 하셨다(사 42:1-7; 49:8; 시16:8-11; 행 2:25-28)

3. Support and undergird Him in His work and deliver Him from the bonds of death and thus enable Him to destroy the kingdom of Satan and establish His covenantal kingdom (Isa. 42:1-7; 49:8; Ps. 16:8-11; Acts 2:25-28).

 

4. 성자께서 자신의 몸인 교회를 모이게하는 것과, 교회의 가르침과 인도와 보호를 위해서 성령을 보내실 수 있도록 성자께 상을 주셨다(요 14:26; 15:26; 16:13-14; 행 2:33).

4. Reward the Son by enabling Him to send out the Holy Spirit for the gathering of His body, the church, and for the church’s instruction, guidance, and protection (John 14:26; 15:26; 16:13-14; Acts 2:33).

 

5. 완성하신 사역에 대한 상급으로 성자께 택함받은 자를 주셨는데, 이들의 모임은 모든 종족과 언어와 민족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하다.(Ps. 22:27; 72:17; Matt. 28:18-19; Rev. 7:9).

5. Give the Son the elect as a reward for His accomplished work, the company of which was so numerous that it would embrace the people of every tribe, tongue, and nation (Ps. 22:27; 72:17; Matt. 28:18-19; Rev. 7:9).

 

6. 자신의 교회를 다스리시도록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와 능력을 위임하시고, 최종적으로는 창세 전에 성자께서 성부와 함께 가지고 계셨던 모든 영광과 함께, 성자께 중재자와 언약적 보증자라는 상급을 주신다(요 17:5).

6. Commit all authority and power in heaven and on earth for the government of His church and would finally reward Him as mediator and covenant surety with the glory that He possessed with the Father as the Son of God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John 17:5).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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