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2020. 1. 5. 22:43

하나님은 들짐승을 간교하게 지으셨는가?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들짐승이 왜 간교한가?


창세기3장 1절에서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라고 기록하고있다.


뱀이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들짐승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어느 정도 간교하다는 뜻을 내포하고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들짐승들을 간교하게 지으셨다는 말인가?


간교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악의에 찬 슬기"로 긍정적인 지혜로움보다는 부정적인 의도가 내포되어있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지으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악의가 담겨있는 간교하다는 언어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있다.


특히나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했던 뱀의 역할은 간교함이라는 부정적인 속성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하나님께서 뱀을 간교하게 지으셨기에 결과적으로 아담이 타락할 수밖에 없었던것이 아니냐는 혼란스러움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짐승을 지혜롭게 지으셨지 결코 간교하게 지으시지는 않으셨다.


그렇다면 원래는 간교하게 지으시지 않았는데 아담보다도 먼저 타락하여 간교하게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여기서 들짐승이 왜 간교한 가에 대해서 주목해보고자한다.


들짐승은 말 그대로 들판에 사는 짐승이다.


들판이 의미하는 바는 확트인 벌판으로서 대부분 인적이 드문 야외나 성벽 바깥의 교외 지역을 뜻한다.


들짐승이 사는 들판은 산에 세워진 동산과는 대비되는 곳이다.


산에 세워진 에덴 동산은 산에 세워진 성전으로서 예루살렘과 유사하게 성전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은 바깥 뜰과 명확히 구분되었던 이방인이 들어올 수 없는 거룩한 곳이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동방에 창설하신 에덴 동산은 거룩한 성전으로서 이방인이 머무를 수 있는 바깥뜰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곳이었다.


에덴 동산 바깥의 들판은 성전으로서의 거룩함에 참여되지는 않았지만 에덴의 확장을 위해서 남겨진 구분되는 곳이었다.


에덴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으로서, 에덴에서 아담은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직책을 감당하였으며,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에 선포하고 실행하는 직책을 맡았다.


에덴에 속하여있는 모든 짐승은 창조 목적에 적합한 지혜를 가지고 아담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만 했다.


아담은 에덴 바깥의 모든 지역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종속시키기 위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야했지만, 뱀이 하와를 유혹하였던 당시는 아직 에덴 바깥에 대한 통치를 온전하게 실행시키지는 못하고있었다.


아담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였던 에덴 바깥의 들판에는 아직 아담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며 이곳에서는 사탄의 세력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있었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창세기 1장 28절의 통치 명령은 단순한 통치 영역의 확장이 아니라 에덴 바깥의 동물들을 지배하고있었던 사단의 세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에덴 바깥의 들판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있었던 곳이었기에, 이러한 들판에서 살고있었던 짐승, 즉 들짐승들은 사단에게 종속되어서 간교한 속성을 가지고되었던 것이다.


말씀을 받지 않은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말씀을 맡은 아담의 통치가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에덴 바깥의 들판에서 들짐승들은 사단의 지배 아래에서 간교한 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사단은 분명 하나님이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으셨던 창조 세계에 들어와서 지혜로운 들짐승들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공략하였기에, 들판에 사는 이러한 짐승들은 사단의 영향으로 간교해 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창세기 3장 1절에 들짐승을 사람으로 대입해보면 "누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 중에 가장 간교한 자이니라"라는 문구가 형성된다. 


이럴 경우 하나님께서는 간교한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좋은 사람을 지으셨지만 (후에 사탄의 영향을 받아) 가장 간교한 사람이 되었다는 해석을 할 수 있다.


간교함에 내포되어있는 악은 하나님의 지으심으로부터 기인된 것이 아니라 사탄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에덴 바깥의 들판으로서의 광야


들짐승이 살던 에덴 바깥의 들판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의  광야에 적용해 볼 수 있다.


광야는 적막하거나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서 일종의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땅이다.


에덴 바깥의 들판은 동산을 적신 강이 둘러 흐르면서 동산의 생명력을 공급받아야만 했는데 동산이 폐쇄되면서 주변의 땅들은 더욱 황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에덴에서 하와를 유혹하였던 뱀은 광야의 승리자로 남게되며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의 후손들에게 절대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에덴 바깥은 성전의 바깥을 뜻하며 성전이 없는 모든 곳은 사탄이 지배하는 광야가 되었다.


광야에서의 인간 문명에서 공통적으로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뱀을 미화시킨 용의 모양이다.


역사 속의 용은 전혀 동떨어진 남미의 고대 문명 속에서도 한 가운데 자리잡고있었다.


이는 용에 대한 문명의 교류없이도 아담 안에서 타락한 모든 인류는 뱀의 후손으로서 용을 섬기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문명이 발전된다고 용의 모양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도시문명 또한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용과 관련도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광야라고 할 수 없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 모든 영역은 광야라고 할 수 있다.


광야인 도시 문명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서는 뱀 같은 간교함을 쉽게 볼 수 있으며, 이들은 서로 필요에 의해서만 존재할 뿐, 사랑이 없는 광야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 곳에서는 모든 인간이 에덴의 들짐승과 같이 간교한 모습을 보일 뿐이다.


광야에 사는 짐승들은 사단의 지배하에 간교한 들짐승이 되어 하나님을 대적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도시를 건설하며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가지만 사단은 이러한 도시를 건설하는 인간들을 들짐승들과 같이 간교하게 만들어가고있다.


하나님을 떠난 도시의 인간들이 들짐승들과 같이 간교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간교하게 지으신 것이 아니라 사단의 지배 아래에서 간교해진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권에 도전하는 들판의 짐승들


에덴 주변의 들판은 사단의 영향력이 극대화 되어있었던 곳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으로서의 에덴과 대비되는 곳이었다.


에덴은 예루살렘과 달리 광야로서의 들판과 명확한 경계가 없었다.


성전으로서의 에덴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주변 들판에 사는 들짐승에게도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하나님의 통치권이 선포되어야했기에, 아담과 하와는주변 들판의 들짐승들과 명확한 경계를 두지 않고 접촉할 수 있었다.


하와에게 접근하였던 뱀은 하와를 유혹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뱀을 접한 하와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선포하고 뱀을 지배하여야 된다는 의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뱀과의 만남은 일종의 영적 전쟁이었지만,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여야 한다는 의식이 없었던 아담과 하와는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시기 위해서 아담에게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명하신다.


에덴에서 아담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땅의 모든 곳을 지배할 의무가 있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가장 큰 걸림돌은 들판에서 아담의 통치를 받지 않고 사탄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들짐승들로서, 이들은 간교하게 사단의 종노릇을 하고있었던 것이다.


사탄은 들에 사는 들짐승들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성전인 에덴을 공략하였으며,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가장 간교한 뱀을 이용하여 하와를 유혹하고 결국 아담으로하여금 범죄케함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 것이었다.


에덴에서의 아담과 하와, 그리고 에덴 바깥의 간교한 들짐승과의 싸움은 마치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이스라엘과 우상을 섬기는 주변 이방 족속들과의 싸움과 유형적 유사성을 가지고있다.


이스라엘은 결국 에덴에서의 아담과 마찬가지로 간교한 이들에게 미혹되어 우상을 섬기게됨으로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갈 수밖에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하시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롯한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없이는 사단이 지배하는 광야에서의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눈에 보이는 광야는 하나님의 은혜 바깥에 있는 이들이 어떠한 곳에서 살아가고있는지를 가시적으로 보여주고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삭과 대비되는 아브라함의 종 하갈이 나은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은혜 바깥으로 쫓겨남으로 인해서 광야에 거주하면서 활 쏘는 자가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을 공략하는 간교한 들짐승들


에덴은 안식을 준비하는 곳이었다.


아담이 뱀의 유혹을 물리치고 온전하게 순종하였더라면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고 안식에 이르는 영광을 누렸을 것이다.


하지만 불순종한 아담은 더 이상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없었기에, 안식에 이르는 길로 들어설 수 없었다.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그룹과 두루도는 불칼로 차단됨으로서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는 안식에 이를 수 없게 된 것이다.


광야는 사단이 지배하는 생명이 없는 곳이다.


에덴 바깥으로 쫓겨난 아담은 안식에 이를 수 없었었기에 구원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순종에 따른 축복과 불순종에 따른 저주를 선언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시된 순종과 불순종은 에덴에서 아담에게 정하셨던 선악과 금령의 재연이었다.


뱀을 통하여 하와를 유혹하였던 사탄은 이방 족속들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함으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게 함으로서, 에덴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공략에 성공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하였던 이방 족속들은 간교한 들짐승들과 같이 성전을 공략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마찬가지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다시 범죄한 것은 에덴에서의 아담의 실패를 재연한 것이었으며,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에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범죄한 아담에게 약속하셨던 원시 복음을 실현시키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아담 안에서 범죄한 죄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으며, 자신들이 실상 에덴을 공략했던 광야의 들짐승들과 한 가지가 되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렘 3:2)"라고 말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간교한 들짐승과 같은 아라바 사람들과 한 가지가 되었음을 고발하고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에서 경험했던 광야에서와는 달리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원했으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식탁을 경험하여야만 했다.


광야로 변하여 황폐하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을 기다려야만 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경험할 새 일을 예언하고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9)"


이는 이스라엘의 실상이 광야나 사막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사야의 외침은 광야나 사막이 되어버린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동산으로 회복시키겠다고 전한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 51:3)"


둘째 아담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처음 아담이 실패한 자리로 다시 오셔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서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신다.


회복된 에덴에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안식에 이르는 길이 완성되었다.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회복시킨 에덴은 처음 아담이 있었던 에덴을 넘어서 안식이 성취된 곳이다.


처음 아담은 간교한 들짐승을 이용한 사단의 공격에 패배하였지만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들짐승이 있는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심으로 사탄에게 승리하셨다.



간교함은 오직 사탄의 작품일 뿐이다.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은 실상 광야에 있었던 상태였다.


이들은 더 이상 자신들이 다가오는 간교한 들짐승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례 요한의 외침은 광야에서의 외침이었지만, 자신들이 광야에있는 들짐승들과 한 가지로 간교한 자라는 것을 알았기에 요한의 회개의 외침에 순응하며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세례 요한은 사단의 종으로서의 간교함을 버리고 그리스도께 나아올 것을 선포하고있다.


에덴 바깥의 들짐승들은 사탄의 영향력에 의해 간교한 들짐승이 되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광야에 있는 간교한 자들의 간교함을 없애고 이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다.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신 것은 간교함의 원천이 있는 광야에서 사탄을 대적하심으로 인간 안에 스며든 간교함을 원펀적으로 차단시키고자 함이었다.


간교함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가만히 숨어들어온 사탄이 뿌린 악이다.


하나님께서는 동물들을 보시기에 좋게 지으셨어도 간교하게 지으시지는 않으셨다.


간교한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했던 뱀은 여자의 후손에 의해서 머리가 깨짐으로서 패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창조하신 분도 아니시며, 아담의 불순종을 조장하신 분도 아니시다.


인간 안에 스며든 불순종과 간교함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몰래 숨어들어온 사탄의 작품일 뿐이다.

posted by Wonho Kim
:
전가교리 2019. 10. 7. 13:01

존 페스코가 말하는 전가교리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역자 서문)


전가 교리는 인간의 실존을 설명해주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전가 개념이 없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고민은 답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전가는 인간이 처한 죄악의 근원적 상황을 설명해주는 개념이다.


전가 개념은 신자인건 불신자이건 간에, 모든 인간의 근원적 문제를 설명해주는 실존적 개념이다.


인간의 악은 전가 개념이 없이 설명 될 수 없으며, 인간의 구원은 전가의 개념이 없이 불가능하다.


전가 교리는 신앙고백에 담겨있어야 할 가장 핵심되는 교리이며, 전가 개념이 없는 신앙고백은 모양만 있을 뿐 내용이 없는 형식적인 것이다.


전가 개념이 없는 신앙고백은 구원의 효력이 없는 자기 도취적인 고백일 뿐이다.


전가 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신앙고백을 하는 이들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인식하게 해준다.


전가 교리의 중요성에 비해서, 불행하게도 많은 신앙인들이 전가라는 용어에 대하여 매우 낯설어하며, 새관점주의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현대 신학자들조차 전가 교리를 외면하거나 부정한다.


전가 교리를 부정하는 톰 라이트는 전가라는 용어가 성경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아니라며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시키지만, 이러한 논리는 칭의나 삼위일체 개념도 성경에서 사용되고있지 않는 용어이기에 거부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사람들이 톰 라이트의 수 많은 책들을 보면서 감동을 받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전가라는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으며, 이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도 들어설 자리가 없으며, 그 자리를 사람이 자신의 의를 채워넣어야하는 인간적인 논리일 뿐이다.


칼빈주의 5대 강령의 첫번째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이다.


이는 인간에게 구원을 이룰 만한 능력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가 교리를 부정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전적으로 부패한 무능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자들이다.


신앙고백은 자신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다.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것은 오직 흠이없고 완전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야만 가능하다.


전가교리가 없는 신앙고백은 잘못된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통로가 될 수가 없다.


이번 글에서는 존 페스코가 정리한 전가에 대한 짧막한 글에 대하여 번역을 해 보고자 한다.


출처https://www.wscal.edu/blog/imputation



전가

Imputation


우리가 살아가고있는 매우 개인주의적인 이 세대에, 우리가 다른 이들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생각을 수용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다. 

In the highly individualistic age in which we live, few embrace the idea that we can be held accountable for the actions of others.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그림을 그려주고있다.

But the Bible paints a very different picture.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하여 책임을 물으신다고 가르친다.

The Bible teaches us that God holds us accountable for our own sins.   


이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분명하다(마 12:36-37).

Christ’s words about this are very clear (Matt. 12:36-37). 


그러나 우리도 역시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세상에 연결되어있다.

But we are also connected to the people and world around us. 


사람들은 자신들의 매일의 삶에서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내적으로 연결된 인간 관계를 인식한다.

People unconsciously recognize this intra-human bond in their day-to-day lives. 


우리는 고립된 비누방울에 살지 않는다- 한 사람의 행동은 종종 전체 공동체로 퍼져나간다.

We do not live in isolated bubbles—the actions of one person often ripple throughout an entire community. 


성경은 이러한 관계를 인식하면서 모든 사람이 두 인물, 즉 아담 혹은 그리스도 가운데 하나와 연결되어있음을 설명한다.

The Bible recognizes this relationship and explains the connection that all people have to one of two figures, either Adam or Christ.


사도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의 각자의 대표적인 행동의 영향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기록한다:"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The apostle Paul spells out the implications of the respective representative actions of Adam and Christ: “For as the one man’s disobedience the many were constituted sinners, so by the one man’s obedience the many will be constituted righteous” (Rom. 5:19, trans. mine). 


아담의 하나의 죄는 대표적 행동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하나의 악행을 모든 인류에게 전가, 혹은 모든 인류의 악행으로 여기셨다.

Adam’s one sin was a representative action—God imputed, or credited, his one sinful deed to all humanity. 


역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대표적인 순종을 그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전가시키신다:"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Conversely, God imputes Christ’s representative obedience to all those who believe in him: “Therefore, as one trespass led to condemnation for all men, so one act of righteousness leads to justification and life for all men” (Rom. 5:18). 


이러한 진술들이 전가교리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이다.

These statements constitute the heart of the doctrine of imputation.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 행함들뿐만이 아니라, 아담과 그리스도의 행함 대하여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신다.

God holds us accountable, therefore, both for our own personal actions, and for the actions of either Adam or Christ. 


성경은 다음의 세가지 핵심적 전가를 설명한다: 아담에서 모든 인류에게로, 택함받은 자의 죄를 그리스도께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택함받은 자에게.

The Bible sets forth three key imputations: Adam to all humanity, the sins of the elect to Christ, and the righteousness of Christ to the elect. 


구약과 신약에는 이러한 세가지 전가들을 설명해주는 다수의 성경 구절들이 있다.

There are a number of biblical texts in the Old and New Testament that address these three imputations.


앞에서 기록한 바와같이,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죄를 모든 인류에게 전가시키셨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As noted above, God imputes Adam’s sin to all human beings: “Therefore, just as sin came into the world through one man, and death through sin, and so death spread to all men because all sinned” (Rom. 5:12). 


우리가 세상을 잠깐만 보게된다면, 우리는 이 말이 진리임을 맨눈으로 보게될 것이다.

If we look at the world for a moment, we see the truth of this statement with the naked eye. 


나라, 연령, 사회, 경제력에서 관계없이 모든 이들은 죽음에 종속된다.

People from nation, age, social, and economic class are subject to death. 


예를 들면, 왜 개인적으로 의도적으로 죄를 지어보지도 않은 이들도 죽음에 종속되어야만 하는가?

Why, for example, are subject to death if they have never personally committed a conscious sin? 


간단히 말하자면, 이들도 아담의 대표적인 행동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종속되는 것이다.

Quite simply, they are subject to death because of Adam’s representative action.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범죄인) 실제적 죄와 (아담의 처음 불순종인) 원죄에 대하여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다.

In theological terms, God holds us accountable for actual sin (our own personal transgressions) and original sin (Adam’s first disobedience).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의 죄를 그리스도께 전가시키시고, 그리스도의 의와 순종을 택하신 자에게 전가시키신다.

God imputes the sins of the elect to Christ and Christ’s righteousness or obedience to the elect. 


바울은 이러한 진리를 비법률적 용어로 다음과같이 표현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Paul reveals this truth in non-legal terminology when he writes: “For our sake he made him to be sin who knew no sin, so that in him we might become the righteousness of God” (2 Cor. 5:21). 


바울은 우리가 로마서 5장 19절에서 볼 수 있는 법률적 용어를, 즉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죄인이나 의인으로 "지명"하시거나 "규정"하셨다는 법률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Paul does not use the legal terminology that we find in Romans 5:19, that is, God “appoints,” or, “constitutes” (kathestemi) people as sinners or as righteous.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죄로 삼으셨다고 설명한다.

Here Paul explains that God made Christ sin.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죄를 생성시키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담당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This does not mean that he created sin in Christ; rather, Christ bore it on our behalf. 


반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죄로 삼으심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있었다.

Conversely, God made Christ sin so that we might become the righteousness of God.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 5:17-18)

Paul writes,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new creation. The old has passed away; behold, the new has come. All this is from God, who through Christ reconciled us to himself” (2 Cot. 5:17-18, emphasis, trans. mine). 


오직 믿음이 의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우리에게 전가해주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의를 받게 되는 것이다.

We receive the righteousness of God through the ministry of Christ when God imputes his perfect obedience to us by faith alone.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죄로 삼으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에 의한 같은 방식으로 옮기신 것이다.

The same manner by which God makes Christ sin is the same way he conveys Christ’s righteousness—by imputation.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대한 바울의 근거 본문은, 구약의 속죄의 날에 그 뿌리를 두고있는 예언인 이사야 53장이다.

Paul’s subtext to 2 Corinthians 5:21 is Isaiah 53, a prophecy that has its roots in the Old Testament Day of Atonement. 


이는 최소한 두 가지 이유로 인해서 중요하다.

This is significant for at least two reasons. 


한 가지는 이사야서가 전가를 다루는 본문이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11-12절)

One, Isaiah is a text that deals with imputation: “By his knowledge shall the righteous one, my servant, make many to be accounted righteous, and he shall bear their iniquities . . . because he poured out his soul to death and was numbered with the transgressors” (v. 11-12). 


두번째는, 선지자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셨다"고 말하는데, 이는 속죄의 날에 관한 언어이다. 

Two, when the prophet states that Christ would “bear their iniquities,” this is language from the Day of Atonement. 


대제사장은 속죄 염소에 자신의 손을 얹혀야만 했으며, 이 염소는 죄를 담당하고서 이를 없애야만 했었다.(레 16:22)

The high priest was supposed to lay his hands on the scape goat and the goat was supposed to “bear” the sins and take them away (Lev. 16:22). 


속죄의 날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환상과의 커다란 차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동물이 아닌 자신의 유일한 독생자에게 전가시키셨다는 것이다.

The big difference between the Day of Atonement and Isaiah’s prophet vision of Christ’s crucifixion is that God did not impute our sins to an animal but to his only begotten Son.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의 바울의 진술은 구약에 깊은 근원적 뿌리가 있다.

Paul’s statements in 2 Corinthians 5:21, therefore, have deep taproots into the Old Testament.


전가는, 악을 징벌하는데 있어서 약속을 실행하여야 할 것을 분명하게 해주는 하나님의 신적인 장부에 계산해서 넣어야할 구원에 관한 냉정한 계산에 관한 것이 아니며, 이러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Imputation is not about a cold calculus of salvation where God moves numbers around in his divine ledger to ensure that he gets his pound of flesh in the punishment of the wicked—far from it. 


하나님의 아들은 머나먼 나라로 들어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율법의 형벌의 고통을 당하셨으며, 이로서 우리를 그의 흠없는 의의 옷으로 입히셨다.

The Son of God entered the far country, suffered the penalty of the law on our behalf, and clothed us with his spotless robe of righteousness. 


우리의 맏형의 희생적 사랑으로 인해서 우리는 더 이상 탕자가 아니다.

Because of the sacrificial love of our elder brother, we are prodigals no more. 


우리는 속임수를 써서 하나님의 호의에 들어가려고해서는 안되며, 그보다는 우리의 맏형의 의의 옷을 입고서 하나님의 현존에 담대히 들어감으로서, 우리의 천상의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야한다(슥 3:1)

We do not have to try to swindle our way into God’s favor but rather enter boldly in his presence wearing our elder brother’s coat of righteousness so that we receive the blessing of our heavenly Father (cf. Zech. 3:1ff).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움을 받아야만 하고, 또 우리가 그러하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의 표현이란 말인가(요1서 3:1)?

What wonderful manner of love is this that we should be called, “children of God,” and so we are (1 John 3:1).


존 페스코의 "Death in Adam, Life in Christ:전가교리"는 이러한 주제에 대하여 매우 자세하게 다루고있다.

Dr. Fesko’s book, Death in Adam, Life in Christ: The Doctrine of Imputation, treats this subject in much greater det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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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
언약 2019. 4. 14. 16:49

구속 언약에서의 요구들과 약속들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들어가는 말

 

신구약의 역사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창세 전 구속 언약 안에서 약속되어진 성부 하나님의 요구와 성자 그리스도의 순종하심과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명령과 축복, 그리고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명령과 축복은 그리스도의 순종하심과 이에 따른 상급으로서의 종말론적 안식의 성취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구속 언약은 창조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명령과 축복의 기초와 근거가 된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예비한다.

 

타락 이전에 아담에게 주어졌던 요구와 약속은 창세 전 구속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께 주어졌던 요구와 축복의 모형이었다.

 

아담에게 약속되었던 종말론적 축복은 실체로서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에,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참여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 주어진 상급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축복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직 믿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아담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 주어진 상급을 공유할 수 있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선포되었던 율법은, 아담에게 주어졌던 요구와 축복의 재연이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축복에 대한 예표였다.

 

비록 처음 아담에게는 종말론적 축복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었지만, 처음 아담에게 약속되었던 종말론적 축복은 구속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께 약속된 상급을 통하여 유추해 볼 수 있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명령과 상급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속 언약의 요구 조건과 약속들을 통해서 살펴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존 페스코는 자신의 저서 “The Trinity and the Covenant of Redemption” 136-138쪽에서 구속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께 주어졌던 요구들과 약속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요구들과 약속들

Requirements and promises

 

요구들

Requirements

 

성부는 성자에게 언약의 보증자, 택함받은 자의 언약의 대표자. 그리고 마지막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과 성부께서 성자에게 구속하려고 주신 이들의 죄의 값을 치르도록 요구하셨다.

The Father required of the Son as covenant surety, federal head of the elect, and the last Adam, to make amends for the sin of the first Adam and those whom the Father had given to Him to redeem.

 

성자는 율법을 지키셔서 처음 아담이 행함에 실패한 것을 성취하심으로서, 자신에게 연합된 이들의 영생을 획득하시는 것이었다.

The Son would accomplish what the first Adam failed to do by keeping the law and therefore securing eternal life for those united to Him.

 

구속 언약에는 세 가지 요구들이 약정되어있다.

Three requirements are stipulated in the covenant of redemption:

 

1.성자는 여자에게서나심으로서 인성을 취하시고, 역사 안으로 들어오셔야했다.

1. That the Son would assume human nature by being born of a woman and would thus enter into history.

 

성자께서는 인성을 취하심으로 인간의 (배고픔, 피로등과 같은) 병약함과 연약함에 속박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셨다.

By the Son’s assumption of a human nature He would be subject to human infirmities and weaknesses (hunger, fatigue, etc.) but be without sin.

 

타락한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서는 성자께서 인간이 되시는 것이 필요했다.(갈 4:4-5; 히 2:10-15; 4:15).

In order to redeem fallen humans it was necessary that the Son become human (Gal. 4:4-5; Heb. 2:10-15; 4:15).

 

2. 성자께서는 비록 율법보다 크시지만, 언약의 보증자로서 그는 자신을 율법 아래에 두셨으며, 그렇게 하심으로서 율법에 대하여 자연적이고, 형벌적이고, 언약적인 관계를 가지셨다.

2. Even though the Son is greater than the law, as covenant surety He would place Himself under it, and as such He would have a natural, penal, and federal relation to the law.

 

율법에 대한 그의 자연적인 관계는 그가 사람으로 성육신하신 것으로 인한 것이며; 그의 율법에 대한 형벌적이고 언약적인 관계는 택함받은 자의 언약적 대표라는 그의 신분과 택함받은 이들을 대신해서 자신이 율법의 형벌적 저주를 감당하시겠다는 의지적 자원에 의한 것이었다.(시 40:8; 마 5:17-18; 요 8:28-29; 갈 4:4-5; 빌 2:6-8).

His natural relationship to the law is by virtue of His incarnation as a man; His penal and federal relationship to the law is due to His status as federal head of the elect and His willingness to suffer the penal sanction of the law on their behalf (Ps. 40:8; Matt. 5:17-18; John 8:28-29; Gal. 4:4-5; Phil. 2:6-8).

 

3.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순종과 속죄를 통해서 영생과 죄의 용서에 대한 공로를 얻으시고, 성령께서는, 죄의 용서, 영생에 대한 의와 직함, 그리고 이들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형상으로의 변형이라는 성자의 공로의 열매를 택함 받은 자에게 적용하신다(요 10:16; 16:14-15; 17:12, 19-22;히 2:10-13; 7:25).

3. After Christ had merited eternal life and the forgiveness of sins through His obedience and satisfaction, the Holy Spirit would apply the fruit of His merit to the elect: pardon of sin, right and title to eternal life, and their transformation into the eschatological image of Christ (John 10:16; 16:14-15; 17:12, 19-22; Heb. 2:10-13; 7:25).

 

구원의 서정이라는 의미에서, 성령은 이중 은혜, 즉 불가항력적으로 신자의 영광으로 인도하는, 칭의와 성화라는 이중 은혜의 유익을 적용하신다.

In terms of the ordo salutis, the Spirit applies the benefits of the duplex gratia, the twofold grace of justification and sanctification, which irresistibly lead to the believer’s glorification.

 

약속들

Promises

 

성부는 구속 언약의 충족된 요구들에 따라서, 성자에게 상을 주시겠다는 언약적 맹세를 하신다.

The Father takes a covenantal oath to reward the Son in accordance with the satisfied requirements of the pactum salutis.

 

구속 언약의 성취라는 관점과, 언약의 보증자로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신 성자의 사역에 비추어 볼 때, 성부께서는:

In view of the establishment of the covenant of redemption and in the light of the Son’s Spirit-empowered accomplished work as covenant surety, the Father would:

 

1.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아들을 위한 육신을 준비하시고, 죄는 없게 하셨다(눅 1:35; 히 10:5).

1. Prepare a body for His Son through the agency of the Spirit and uncontaminated by sin (Luke 1:35; Heb. 10:5).

 

2. 성자께서 언약의 중재자로서의 자신의 사역을 실행하실 수 있도록 아들을 필요한 재능들과 은혜들로 준비를 시키셨다. 그러므로 성부께서는 성자를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성령으로 기름을 부으셨는데, 이 약속은 성자의 세례에서 성취되었다 (사 42:1-2; 61:1; 요 3:34).

2. Equip the Son with the necessary gifts and graces in order that the Son could carry out His work as covenant surety. The Father, therefore, would anoint the Son with the Spirit without measure, a promise that was fulfilled at His baptism (Isa. 42:1-2; 61:1; John 3:34).

 

3. 성자의 사역을 지지하고 견고하게 하시고 그를 죽음의 권세에서 구하심으로서, 성자께서 사단의 나라를 깨부수고 자신의 언약의 나라를 세우실 수 있도록 하셨다(사 42:1-7; 49:8; 시16:8-11; 행 2:25-28)

3. Support and undergird Him in His work and deliver Him from the bonds of death and thus enable Him to destroy the kingdom of Satan and establish His covenantal kingdom (Isa. 42:1-7; 49:8; Ps. 16:8-11; Acts 2:25-28).

 

4. 성자께서 자신의 몸인 교회를 모이게하는 것과, 교회의 가르침과 인도와 보호를 위해서 성령을 보내실 수 있도록 성자께 상을 주셨다(요 14:26; 15:26; 16:13-14; 행 2:33).

4. Reward the Son by enabling Him to send out the Holy Spirit for the gathering of His body, the church, and for the church’s instruction, guidance, and protection (John 14:26; 15:26; 16:13-14; Acts 2:33).

 

5. 완성하신 사역에 대한 상급으로 성자께 택함받은 자를 주셨는데, 이들의 모임은 모든 종족과 언어와 민족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하다.(Ps. 22:27; 72:17; Matt. 28:18-19; Rev. 7:9).

5. Give the Son the elect as a reward for His accomplished work, the company of which was so numerous that it would embrace the people of every tribe, tongue, and nation (Ps. 22:27; 72:17; Matt. 28:18-19; Rev. 7:9).

 

6. 자신의 교회를 다스리시도록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와 능력을 위임하시고, 최종적으로는 창세 전에 성자께서 성부와 함께 가지고 계셨던 모든 영광과 함께, 성자께 중재자와 언약적 보증자라는 상급을 주신다(요 17:5).

6. Commit all authority and power in heaven and on earth for the government of His church and would finally reward Him as mediator and covenant surety with the glory that He possessed with the Father as the Son of God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John 17:5).

 

posted by Wonho Kim
:
언약 2019. 4. 4. 13:18

구속 언약에서의 삼위 하나님의 역할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서론

 

구속 언약은 창세 전에 택함받은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삼위 하나님간에 맺어진 협약으로서 역사 안에서의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의 근거가 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근거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창세 전 구속 언약에 있다.

 

에베소서 1장 4절에서는 신자가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받았음을 말하고있다.

 

역사 가운데 이루어지는 택함받은 자에 대한 구원은 이미 창세 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합의에 의해서 예정된 것이다.

 

신자가 창세 전에 택함받은 것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며, 성부께서는 택한 자를 그리스도께 주심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창세 전에 성부 하나님과 택함 받은 자의 구원에 대한 협약을 근거로, 택함받은 자를 구원하시기 위한 지상 사역을 감당하신 것이다.

 

말씀의 기록에는, 성령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구원 협약에 참여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기에, 창세 전 구속 언약이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의 언약인지, 아니면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참여한 언약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개혁주의에서보는 대체적인 관점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참여하신 협약에 의한 구속 언약으로 보고있다.

 

John Fesko는 성령도 구속 언약에 참여하였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다음 글은 Jonn Frsko의 The Trinity and the Covenant of Redemption 134-136을 번역 정리한 것이다.

 

언약의 당사자들

Parties of the covenant

 

성부

Father

 

성부는 성자와 성령과의 협약에 의해서 구속 언약을 시작하신 분이시다.

The Father is the one who initiates the pactum salutis in concert with the Son and Spirit.

 

성부는 성자에게 언약의 보증자로서의 역할을 하시도록 지명하셨다.

The Father appoints the Son to the role of covenant surety.

 

예를들면,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은 성부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엡 1:4)고 말하고있다.

In Ephesians 1, for example, Paul states that the Father ‘chose us in him [Christ]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Eph. 1:4).

 

달리 표현하자면, 성자와 성령이 아닌 성부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받은 자를 선택하신 것이며, 이는 언약의 핵심 요소들 가운데 한 가지인 것이다.

In other words, the Father, not the Son and Spirit, chose the elect in Christ, one of the key elements of the pactum.

 

더군다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가 자신을 보내셨다고 반복적으로 설명하신다(요 6:44, 57; 8:18, 42; 14:24; 17:21, 25; 20:21).

Moreover, Christ repeatedly explains that the Father sent Him (John 6:44, 57; 8:18, 42; 14:24; 17:21, 25; 20:21).

 

이러한 맥락에서 성자는 성부께서 ‘자신을 거룩하게하셨고 자신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을 증거하신다(요 10:36).

In this vein the Son testifies to the fact that the Father ‘consecrated and sent [him] into the world’ (John 10:36).

 

누가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나라를 언약하셨다”는 말씀은 주목할만하다.

Notable is Christ’s statement in Luke’s Gospel that the Father covenanted a kingdom to Him (Luke 22:29).

 

(역자 주: 누가복음 22장 29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나라를 맡기신 것은, 창세 전에 성부께서 성자 그리스도께 나라를 맡기신 것의 유형적 반복이다. 창세 전에 성부께서 성자에게 나라를 맡기셨다는 표현은 언약의 표현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언약하심을 나타내고있다.

이 땅에서 실현된 하나님 나라는 창세 전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그리스도께 맡기신 하나님 나라의 표현이며,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창세 전 구속 언약에 근거를 두고있다)

 

또한 성부는 성자의 수고에 의한 성공적 성취에 대하여 아들에게 상급을 약속하신 당사자이시다.(시 2:7-9;  신 17:19-20; 28:1과 비교).

The Father is also the one who promises to give a reward to the Son upon the successful completion of His labors (Ps. 2:7-9; cf. Deut. 17:19-20; 28:1).

 

성부는 선택하시고, 지명하시고, 보내시고, 거룩하게하시고, 성자의 수고에 상을 약속하신다.

The Father elects, appoints, sends, consecrates, and promises to reward the Son’s labors.

 

이와같이, 성부는 언약을 시작하신 분이시다.

Hence, the Father is the one who initiates the pactum.

 

성자

Son

 

구속 언약 안에서 성자는 언약의 보증자로서의 역할을 하신다(히 7:22).

Within the pactum salutis the Son functions as covenant surety (ἔγγυος) (Heb. 7:22).

 

보증자나 담보자는 다른 이를 대신해서 법적인 책임들을 감당한다.

A surety, or guarantor, assumes the legal responsibilities on behalf of another.

 

이러한 면에서 성부는 성자를 보증자로 지명하심으로서, 성자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위해서 중재자가 되시고 그들의 죄를 속죄하심은 물론, 율법에 대하여 자신이 완전한 순종을 행하신 것이다(사 52:13-53:12; 롬 4:25; 5:12-21; 고후 5:17-21).

In this respect the Father appoints the Son as surety so that He will offer His perfect obedience to the law as well as intercede on behalf of the covenant people of God and make satisfaction for their sins (Isa. 52:13-53:12; Rom. 4:25; 5:12-21; 2 Cor. 5:17-21).

 

이와같이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시며, 택함받은 자의 언약적 대표자이시다.

As such, Christ is the last Adam (ὁ ἔσχατος Ἀδὰμ) (1 Cor. 15:45) and is the federal head of the elect.

 

그리스도는, 구속 언약으로부터 유래된, 은혜 언약 안에서 언약적 보증자로서의 역할을 하신다.

He operates as covenant surety within the covenant of grace, which flows out of the pactum salutis.

 

행위 언약은 처음 아담(고전 15:45)이 마지막 아담의 모형이었던 것과 같이, 은혜 언약(롬 5:14)에 있어서 성자의 사역을 예상하게하는 유형학적 선봉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The covenant of works serves as an anticipatory typological precursor of the Son’s work in the covenant of grace (Rom. 5:14), as the first Adam (πρῶτος Ἀδὰμ) (1 Cor. 15:45) was a type of the last Adam (τύπος τοῦ μέλλοντος).

 

확신하건데, 행위 언약이 단순히 유형학적이지만은 않은 것은, 이어지는 장에서 탐구될 것이지만, 여기에 더해져야할 중요한 인류학적 고려사항들이 있기 때문이다.

To be sure, the covenant of works is not merely typological, since there are important anthropological considerations attached to it that will be explored in subsequent chapters.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의 보증자로서의 성자는 택함받은 자를 대신하여 깨어진 행위 언약을 충족시키신다.

Nevertheless, as covenant surety the Son fulfills the broken covenant of works on behalf of the elect.

 

택함받은 자는 처음에는 구속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께 언약적으로 연합되며, 그 다음에는 부차적으로 구속적 역사 안에서, 성령의 거듭나게하는 사역에 의해서 성자께 신비적으로 연합된다.

The elect are first federally united to Christ in the pactum salutis and then subsequently, in redemptive history, they are mystically united to Him by the regenerative work of the Holy Spirit.

 

성령

Holy Spirit

 

일부 신학자들의 논리 가운데에는, 구속에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이 구속 언약의 바깥에 자리잡고있으며, (성령의 사역이) 이론적으로 하나님의 결정에 앞서거나, 혹은 은혜 언약에서 성자의 사역의 실행 이후에 오는 것으로 위치되어지기도한다.

In the formulation of some theologians, the Spirit’s work in redemption is placed outside of the pactum salutis, either in the logically prior consilium Dei or after in the application of the Son’s work in the covenant of grace.

 

이와같은 논리들은, 이들이 구속 언약을 기독론적인 방식으로 해석하기에, 하위 삼위일체주의적은 아니지만,

성령의 역할이 구속 언약 자체 안에서 조화를 이루면서 포함되어있다는 성경적 자료에 대한 좀 더 보강된 설명이 요구된다.

While such formulations are not sub-trinitarian, as they construe the pactum in a christological fashion, a thicker account of the biblical data requires that one coordinate and include the Spirit’s role within the pactum itself.



이러한 관점에서, 성자가 성부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이 자신의 뜻이 보냄받은 것에 대한 동의를 내포하고있다는 것을 인식하고있었던 것과 같이, 성령이 보냄을 받았다는 것은 자신이 협의와 같은 것에 동의하는 것을 인식하고있다는 사실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15:26과 비교).

In this respect, just as the Son acknowledges that the Father sent Him into the world, which implies His willing agreement to be sent, so the fact that the Spirit is sent implies His agreement and consent to the same: ‘But the Helper, the Holy Spirit, who the Father will send in my name, he will teach you all things and bring to your remembrance all that I have said to you’ (John 14:26; cf. 15:26).

 

고려되어야만 할 또 다른 요소는 언약의 보증자로서의 성자의 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이다.

Another element that should be factored is the Spirit’s role in the Son’s office as covenant surety.

 

성부는 성자에게 자신의 직무를 지명하셨지만, 성자는 자신의 사역을 성령과 분리하여 실행하지는 않으신다.

The Father appoints the Son to His office but the Son does not execute His work in isolation from the Spirit.

 

그보다는 성부는 성자를 성령으로 더불어 기름을 부으셨다.

Rather, the Father anoints the Son with the Spirit.

 

이러한 관점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그리스도라는 명칭으로서, 이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Notable in this regard is the title of Christ (חישמ), which means anointed one.

 

여기에는 당연히, 성자가 무엇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는가라는 질문이 뒤따른다.

This begs the question, With what was the Son anointed?

 

구약의 제사장이나 왕이 기름으로 부음을 받았던 것과는 달리 (예, 출 30:30; 레 8:12; 삼상 16:12), 성부는 성자를 성령으로 기름 부으셨다(사 61:1; 눅 4:18; 행 10:38).

Unlike the Old Testament priests and kings who were anointed with oil (e.g., Exod. 30:30; Lev. 8:12; 1 Sam. 16:12), the Father anointed the Son with the Spirit (Isa. 61:1; Luke 4:18; Acts 10:38).

 

그러므로, 성자는 언약의 보증자로서의 자신의 사역을 성령의 능력으로 실행하셨다.

The Son, therefore, carries out His work as covenant surety in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성자의 사역에 성령이 수반된다는 것은, 구속 언약의 구성원 가운데 한분으로서의 성령의 동의를 내포하면서 동시에 성령의 동의를 요구한다.

The Spirit’s involvement with the work of the Son both implies and requires His consent as one of the parties of the covenant of redemption.

 

posted by Wonho Kim
:
언약 2019. 2. 17. 09:37

선택과 예정에서의 구속 언약


김원호(dent4834@hanmail.net)


구속 언약은 영원 전에 삼위 하나님 사이에서 맺어진 영원한 언약이다.


성부는 중보자로서의 성자 안에서 한 백성을 선택하셔서, 성령을 통하여 구원을 얻을 만한 믿음을 주신다.


구속 언약은 영원 전에 이미 인류의 타락을 고려한다.


구속 언약은 성자의 자기를 내어주심과 성령의 중생 사역과 성부의 영원한 계획의 집행으로 이어진다.


성도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받은 자이다.(엡1:4)


로벗 팔머슨과 같이 언약을 제한된 범위에서 좁게 이해할 경우 구속 언약을 생각 할 수가 없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자라는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구원론적 중보는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이라는 근거를 요구한다.


하나님의 작정과 언약을 구분하지 않는 유니테리언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와 성령의 사역과 관계없이 구원과 유기를 주관적으로 결정한다는 오류를 범하고있다.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이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이루어지는 반면 구속언약은 삼위 사이에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 안에서 택함 받은 자들에 제한된 것이다.


성도의 구속은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 안에서의 선택과 예정을 근거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도는 구속언약으로 안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으며, 그리스도는 구속 언약 안에서 택한 자들의 머리되시며, 성도는 구속 언약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보증과 성령의 선물로 구원에 참여되는 것이다.


존 오웬이 관여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수정한 회중교회 수정본인 사보이 선언에서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근거로한 택한 자의 선택하심에 대하여 기술하고있다.


성도는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음은 물론, 언약의 보증으로서의 아들의 약속 안에서 인침을 받은 것이다.


이 모든 선택과 구속의 역사의 근원에는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이 자리잡고 있으며, 구속 언약은 모든 교리의 근원에 자리잡고있는 것이다.


모든 언약의 근본이 되는 구속 언약에 대하여 John Fesko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다음 글은  J. V. Fesko의 The Trinity and the Covenant of Redemption의 1장의 일부를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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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약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에 있어서, 신학자들은 언약의 보증으로서의 아들의 직책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또한 교회의 머리로서 그의 선택적 역할을 말해주고있는 것이다.

In common formulations of the pactum, theologians address the Son’s appointment as covenant surety, which also functions as His election as head of the church.


성부께서는 선택이라는 강령 안에서 택할 자를 선택하셨고 이들을 그리스도께 연합시키셨다.

The Father chose the elect and united them to Christ in the decree of election.


이러한 협약의 예들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회중 교회판인 사보이 선언에서도 볼 수있다.

Examples of this arrangement appear, for example, in the Savoy Declaration (1657), the Congregational version of the Westminster Standards.


이 선언에서는 하나님께서 특정 수의 개인들을 영생에 이르도록 예정하셨으며,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으며(3.3, 5), 그리스도께서 택함받은 자를 구속하심(3.6)에 대하여 진술하고있다.

The Declaration states that God predestinated a certain number of individuals unto everlasting life, and they were ‘chosen in Christ’(III.iii, v). Christ redeems the elect (III.vi).


신앙고백의 나머지 부분을 읽지 않는다면, 비록 어떤 이들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선택받은 자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셔서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다는 특별한 진술을, 무시한다고 할지라도, 예정이 막연한 선택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Read in isolation from the rest of the confession, a person might conclude that predestination is an abstract choice, although he would have to ignore the specific statement that God chose the elect ‘in Christ ’to reach this conclusion.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보이 선언은 계속 말하기를:

Nevertheless, the Declaration goes on to state: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기뻐하심으로,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맺어진 언약을 따라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가 되시며;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 자신의 교회의 머리이시며 구속자이시며, 모든 것들의 상속자이시며, 세상의 심판자이시며; 모든 영원으로부터 사람으로하여금 자신의 씨가 되게하셨으며, 때가 되면 그에 의해서 구속되고, 불리워지고, 의롭게되고, 성화되고, 그리고 영화롭게 되도록, 자신의 독생자이신 주 예수를 선택하시고, 정하셨다.

It pleased God, in his eternal purpose, to choose and ordain the Lord Jesus his only begotten Son, according to a covenant made between them both, to be the Mediator between God and man; the Prophet, Priest, and King, the Head and Saviour of his Church, the Heir of all things and Judge of the world; unto whom he did from all eternity give a people to be his seed, and to be by him in time redeemed, called, justified, sanctified, and glorified. (VIII.i) 6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로 섬기도록 선택하셨으며, 또한 택자를 그리스도께 주셨는데, 이는 구속 언약의 맥락 안에서 발생한 것이다.

God both chooses His Son to serve as mediator between God and man and He gives the elect unto Christ, and this occurs within the context of the covenant of redemption.


신학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을 말하면서, 예상될 수 있는 것과같이, 예정이나 택정, 택함이라는 용어들을 사용한다.

Theologians spoke of election in Christ and employed the nomenclature of predestination, choosing, or election, as might be expected.


그러나 그들은 선택과 구속 언약 사이의 밀접한 관계들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른 용어들을 사용하기도한다.

But they also employed other terms to denote the close associations between election and the covenant of redemption.


이들은 언약적 연합이나 강령적 연합과 같은 방식을 사용해서 언약 안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한다.

They spoke of union with Christ within the pactum by means of terms such as federal union or decretal union.


예를 들어 헤르만 비치우스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여러가지 다른 면들의 차이를 구분한다: 강령의 연합이나 영원한 동의라는 연합에 의해, 성부가 그리스도를 택자의 언약적 머리로 지명하셨으며, 참되고 진실된 연합은  거듭남과 믿음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Herman Witsius (1636-1708), for example, distinguishes between several different aspects of union with Christ: the union of the decree (in aeterno Dei decreto), the union of eternal consent (unione confoederationis aeternae), by which the Father constitutes Christ as federal head of the elect, and the true and real union (vera et reali unione), which occurs through regeneration and faith.


찰스 핫지는 자신이 쓴 에베소서 1장의 주석에서 이와 비슷한 구분들을 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이 거룩함과 영생으로 선택된 것은, 그들의 머리이며 대표자로서, 그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로 인한 것이다.

Charles Hodge (1797-1878) offers similar distinctions; in his commentary on Ephesians 1 he writes: It was in Christ, as their head and representative, they were chosen to holiness and eternal life, and, therefore, in virtue of what he was to do in their behalf.


그리스도와의 언약적 연합은 모든 실제적 연합의 선행 사건이며, 그 근원이 된다.

There is a federal union with Christ which is antecedent to all actual union, and is the source of it.


하나님께서는 구속 언약 안에서 그의 아들에게 백성을 주셨다.

God gave a people to his Son in the covenant of redemption


이들은 언약 안에 속하여 있으며, 언약 안에 속하여 있었기 때문에,--달리 표현하자면, 그들이 자신들의 머리이며 대표자로서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때가 되어 성령과, 다른 모든 구속의 유익들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Those included in that covenant, and because they are included in it,—in other words, because they are in Christ as their head and representative,—receive in time the gift of the Holy Spirit, and all other benefits of redemption.


하나님께서는 택함받은 자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으며, 또한 그리스도는 그들의 머리와 대표자가 되시며,- 그리스도는 그들의 언약적 대표이시며, 이로 인해서 그들은 구속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와 언약적 연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God chooses the elect ‘in Christ,’who is also their head and representative –He is their federal head, and hence they are in federal union with Christ in the covenant of redemption.


이러한 구분들의 핵심적인 요점은, 신학자들이 예정을 다른 여러가지 교리들과 연계시켜 생각하고있지만, 특별히 기독론과 관련시키고있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다.

The ultimate point of these distinctions was to recognize that theologians considered predestination alongside of several other doctrines, but especially in conjunction with christology.


그들은 이와같은 다양한 교리들을 구속 언약을 통하여 하나로 묶고있다.

They united these different doctrines through the covenant of redemption.


posted by Wonho Kim
:
2019. 1. 9. 21:27

복음과 죄의 본질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죄에 대한 인식


죄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복음이 복음이 될 수 없다.


복음은 죄인에게 최적화된 말씀이지만, 복음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죄에 대한 인식에 따라서, 복음은 달리 해석될 수도 있다.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하다.


인간 자신이 전적으로 부패한 본질적 죄인이라는 인식은, 자존심이 강한 현대인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개념이다.


본질적 죄인인 인간은, 자신의 본질적 죄를 인식할 수 없는, 근본적으로 죄에 대한 인식 체계가 잘못된 존재이다.


특히나 자신들의 인식 체계를 근거로 철학을 하는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인식 체계가 잘못되어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


자신이 본질적으로 잘못된 죄인이라는 인식은 실존주의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실존주의를 근거로한 현대 신학자들과 이들의 산물인 현대신학은 한결같이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지 않는 현대 신학자들은, 인간의 행동 방식이나 환경의 개선을 통해서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려고한다.


이들은 인간이 죄인인 것은 인정하고있지만, 인간 누구나 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본질적 죄인이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펠라기우스로부터 시작하며, 중세 로마카톨릭 신학자들은 물론, 알미니우스, 슐라이허마허로 이어지는 인본주의 신학자들은 죄의 문제를 외부적 환경의 변화를 통해서 해결하려고한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죄성이 아담으로부터 전가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공동체적 특성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말한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인간의 사회적 속성에서 기인된 것이며,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사회적 속성으로 인하여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분석에 기초한 죄의 문제의 해결책은, 인간의 죄성에 대한 접근보다는, 사회 제도의 개선을 통한 문제 해결 방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인간이 아담의 죄를 전가받았는가에 대해서는 개혁주의와 다소 차이가 있지만, 어거스틴은 모든 인간이 아담의 죄를 유전적(개혁주의에서는 하나님의 강령에 의한 것으로 규정하고있지만)으로 전가받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의지적 선택과 관계없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체질을 가지고있다고 말한다.


아담으로부터 전가된 죄는 피할 수 없는 본질적 죄인 반면에, 외부 환경으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아 짓는 죄는, 인간이 의지적으로 피할 수 있는 피상적인 죄에 불과할 것이다.


인간의 죄악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복음이 제시하는 방법론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죄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 따른 다양한 유형들


성경에서 말하고있는 죄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신학적 유형들이 나타난다.


신앙생활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교회를 교회답게하기 위한 신앙생활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변혁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추구하는 것이다.


사회변혁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사회와 교회와의 관계, 혹은 사회 자체를 어떠한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행동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종교 개혁 이전에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었지만, 종교 개혁 이후에는 다양한 형태로의 분리가 진행되었다.


이원론에 대한 논쟁은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 교회와 세속 사회와의 분리에 따른 성과 속에 대한 논쟁으로부터 본격화되었다.


특히 세속 사회의 분리는 계몽주의와 더불어 더욱 가속화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하나님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쳤던 계몽주의자들은, 하나님을 배제한 문화를 추구하게되었다.


세속 사회의 교회로부터의 분리에 부담감을 갖게된 이들에게는, 교회가 세속 사회와 분리될 것인가, 아니면 세속 사회와 하나가 될 것을 추구할 것인가가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


종교 개혁자들과 청교도 신학자들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변혁보다는 기독론을 기초로한 구원론에 집중하였다.


세속 사회의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에 부담감을 갖게된 이들은 정치와 예술을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세속 사회의 변혁에 관심을 갖게된다.


카이퍼로부터 시작된 신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신론을 기초로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인간의 죄성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사회 변혁을 추구하며, 펠라기우스적 사고로 전환될 수 밖에 없었다.


신론 중심의 개혁주의 신학은 자연스럽게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현대신학자들의 자유주의 신학과 합류될 수 밖에 없었다.


현대신학자들의 신학이 사회 개혁을 추구하는 이들의 신학으로 선택될 수 있었던 근거는, 현대 신학자들이 규정하는 죄의 문제와 이에 대한 해결책이 사회 제도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실례들은 칼바르트와 톰 라이트, 그리고 알버트 월터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사회개혁을 외치는 세계교회협의회(WCC)의 교회론의 기초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는 WCC의 교회론이며, 전통적 교회가 모이는 교회라면, 선교적 교회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흩어지는 교회이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으로 형성된 선교적 교회는, 구원의 최종 종착지를 교회가 아닌 세상에 두고 있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란, 성부 하나님이 선교의 주체되시는 분으로서,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 즉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마찬가지로 성부 성자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교회를 이 땅에 세우셔서 이 땅의 모든 피조물을 대상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다는 개념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모든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선교의 수단으로서의 선교적 교회를 말하는 것이며, 선교의 최종 목적지는 세상이다.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 보는 교회는, 전통적 개념에서의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 속으로 흩어지는 교회이다.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에서의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교회로서, 하나님의 선교의 최종 목적은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하나님 나라 운동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동일하게 세상이라는 목적지를 향하고있다.


톰 라이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개인의 윤리적 삶을 통한 사회 변혁을 추진한다.


새관점에서는 아담의 죄의 전가를 인정하지 않으며, 인간이 본질적으로 죄성을 가진 죄인이라는 개념을 수용하지 않기에, 은혜보다는 인간 스스로의 자력에 의한 변혁을 추진한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카이퍼로부터 시작된 신칼빈주의 기독교세계관과 합류하여 또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해 나아간다.


신칼빈주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대표적 저서인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은, 새관점을 수용한 개정판을 통하여, 모든 영역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카이퍼의 영역주권과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혼합하면서,  문화 구조의 방향 전환을 통한 문화물의 천국보존이라는 문화 변혁을 추구해 나아간다.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와 톰 라이트의 새관점, 그리고 알버트 월터스의 기독교 세계관은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를 통하여 결실을 맺게된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사회변혁을 위한 교회인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는,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와, 톰 라이트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신칼빈주의 기독교 세계관을 종합하여, 포스트모더니즘에 적합화된 이머징 처치의 형태를 갖춤으로서, 교회보다는 사회 변혁을 위한 공동체의 성격을 갖게된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라는 이머징미셔널 처치emerging missional는 Communitas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를 이루어간다.


이머징 처치의 선구자였던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이들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보편사적 학문을 추구하는 판넨베르크의 제자였던 스탠리 그렌츠와, 근원적 혁명의 저자인 존 하워드 요더의 재세례파 사회관을  종합적으로 취합하여 사회 변혁을 위한 이머징 처치를 만들어나갔음을 고백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의 본질적 죄성보다는 사회 변혁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추구하기에, 이들의 신학은 기독론적 구원론보다는 신론 중심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중심이 옮겨질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죄의 문제가 사회에 있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이들에게  인간의 본질적 죄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이제까지 언급하였던 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죄의 문제를 인간의 내부보다는 외적인 환경에 있다고 봄으로서, 사회 변혁을 통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통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인간이 죄를 짓기 이전에 본질적 죄인이냐, 아니면 죄를 지음으로서 죄인으로 규정되느냐에 대한 선택에 따라서, 교회와 신앙 생활의 방향성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노예 의지


인간이 변혁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 자유 의지는 필수적 요소이다.


본인의 의지가 노예 의지라고 한다면, 인간은 사회 변혁을 추구해 나아갈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없다.


공중 권세잡은 자인 사탄에게 종속된 의지로는, 사회는 커녕 자신조차도 변혁시킬 수가 없다.


노예 의지를 가진 이들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필요하다.


노예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어떠한 긍정적 변화도 기대할 수가 없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와 능력이 있다면 은혜가 요구되지 않는다.


능력있는 자에게 복음은 삶의 지침일 뿐이다.


인간이 죄를 짓는 원인이 외적 환경에 있다면, 복음은 외적인 환경을 개선하는 수단일 뿐이다.


하지만 죄를 짓는 원인이 인간 내부에 있다면, 본질적 죄에 대한 해결을 위해서 제시되는 복음은 은혜의 복음이 되어야한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이 이미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자신이 살아있다고 말하는 생명은 육신의 생명일 뿐이다.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을 입고서 하나님과 교통이 가능했으며, 천상의 세계upper-register를 공유했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인간은 비록 육신은 살아있으나, 그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에, 하나님을 향한 긍정적 기대를 할 수 없는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사회적 환경에서 죄의 문제를 찾으려는 이들은 인간 안에 하나님을 향한 긍정적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고 보고있지만, 이러한 견해는 바울의 입장과는 대립된다.


죽은 자의 방향성은, 죄성을 가진 육신의 욕심의 방향성으로 향하여있기에 최종적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


바울은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이 죄인이었던 때의 상태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고 말한다.


육체는 인간이 지니고있는 몸 자체를 말하기에 인간 존재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가 없으며, 인간은 육체의 욕심에 종속되어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할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있다.


이 땅에서 인간은 육체의 노예이며, 육체에 종속된 존재이기에, 육체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노예 의지를 가지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외부의 부정적 환경들은 내부의 부정적 상태가 외부로 드러나 나타난 결과들일 뿐이다.


인간의 내적인 상태에 대한 접근이 없이 외적인 상태만을 변화시키려고하는 것은, 실체를 외면한 현상의 변형만을 시도하는 것이다.


문제에 대한 원인적 접근이 없는 현상적 해결책은 일시적 효과만 있을 뿐, 오히려 근본적 상태만 악화시킬 뿐이다.


문제에 대한 원인적 접근 방식은 본질적 실체 자체를 다루는 것이기에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동물들은 각기 그 본성에 따라서 움직이며, 각기 그 종들의 특성을 드러내면서 살아가듯이, 죄성을 가진 인간의 행동 방식도 본성을 따라가는 동물과 한 가지이다.


개가 개답지 않게 행동할 수 없듯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움직이는 인간은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본질 자체가 죄인인 특성을 드러내면서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개가 개의 특성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가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도 인간의 죄성이라는 특징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종교 개혁자들은 인간의 의지를 노예 의지라고 보았다.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기 이전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성을 지니고있다.



본질적 죄인


사회법에서는 범죄하지 않은 사람에게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회법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법이다.


사회법은 자연법의 한 부분에 속하여있지만, 자연법에는 관습과 양심을 포함한 좀 더 광범위한 내용들을 포함하고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자신이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온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지만, 외적으로 청결함을 자랑하는 바리세인과 서기관들 조차도 자신들이 죄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인간 모두가 자신이 죄가 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본질적 죄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고있는 것이다.


인간은 죄를 짓기 이전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본질적 죄인이다.


갓 태어난 어린 아이라도 하나님의 특별 은혜에 의한 선택이 없다면,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녀임을 알 수 있다.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들의 행동 방식은 어떤 민족보다도 우월한 시민 의식을 보여주는 행동이었지만, 그들의 행동 방식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자신들의 본질적인 악을 가리기 위하여 무덤에 칠하는 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복음에서 다루고자하는 죄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죄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 자체의 죄성에 대한 것이다.


죄악은 현상적 죄일 뿐 실체가 아니다.


실체는 이미 아담 안에서 육신이 된 인간의 본질에 있다.


인본주의, 자유주의 등으로 표현되는 신학적 갈등은 실체인 인간의 본질적 죄를 외면하고 현상으로서의 죄악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행동 방식을 개선하기 위한 것보다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죄인임을 고발하고, 이들을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모으기 위한 것이다.


복음은 단순히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어느 유명한 교회의 목사님은 도덕적인 본을 보여주며 욕심을 내려놓음으로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있지만, 그곳에 모여든 교인들은, 그가 전하는 복음이 도덕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생명이 없는 복음이라는 사실을 인식을 하지 못하고있다.


예수님이 도덕적 본을 보여주신 따름의 대상이라면, 이러한 인물은 인류 역사상 얼마든지 있다.


교회가 도덕적인 타락으로 인해서 사회의 지탄을 받고있는 이유로 인하여, 도덕적인 본을 보여주는 것이 교회의 일차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복음은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죄인임을 고발하고있다.


이는 도덕적인 행동의 유무에 관계가 없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하실 수 있으셨던 것은, 이들이 죄없다 생각하는 바리세인들과는 달리, 자신의 죄를 고백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질적 죄를 가리려는 목적의 도덕적인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신들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길 원하신다.


인간이 본질적 죄인인 것은,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니고는 그 원인을 찾아볼 수가 없다.



죄의 고백


인간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용서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본질적인 죄인임을 고백하여야만 한다.


자신의 본질적 죄를 외면하고 표면적인 죄만을 회개하고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가 없다.


대부분의 현대 신학자들이 말하는 회개를 전제로한 신앙고백은 죄를 지은 것에 대한 고백을 말하고있다.


현대신학자들이 말하는 회개에는 암묵적으로 자신이 본질적 죄인은 아니지만,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를 하나님께 고백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들이 말하는 회개는 바리세인들이 행하려는 선행과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참된 고백은, 자신이 본질적으로 아담 안에서 육신이 되었음을 고백하고, 육신의 소욕을 쫓아서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아담의 죄에 동참한 본질적 죄인임을 고백하여야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지 않고는, 인간에게는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것을 거부하며 살아갈 수있는 능력이 없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누구나 다 자신들이 죄인인 것을 알고있기에, 자신의 죄를 다스리기 위해서 고행을 하거나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적선을 하거나, 선행을 하기도하지만, 이러한 방법으로는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다스릴 수는 없다.


거듭남이 없는 온갖 종류의 수행이나 선행은 또 다른 육신의 소욕의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참된 거듭남은 자신에 대한 주체가 바뀌어야만 한다.


모든 인간에게 아담의 죄가 전가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톰 라이트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습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노력은 바리세인들의 위선과 다름이 없는 악일 뿐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위선적인 하나님 나라일 뿐이다.


인간은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육신을 입고있는 이상 끊임없이 고발되어가는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


고발되어가는 인생에 대한 문제 해결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 밖에 없다.



윤리 도덕과 죄의 본질


다윗은 평생을 자신의 죄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했다.


다윗의 고통은 자신의 육신이 어떠한 죄성을 가지고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심은, 다윗이 깨달은 본질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다윗과 같이 죄의 문제에서 완전하게 해방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죄에 대한 심판에서는 벗어났을지라도,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자신의 육신의 심각한 죄성을 인식하면서 살아가야한다.


성도라고 할지라도 자연법을 초월하여 살아갈 수가 없으며, 초자연적인 삶을 살수도 없다.


그렇다고 성도가 수련을 통하여 자신의 죄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련을 통한 윤리 도덕의 실천은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어느 종교에서나 볼 수 있다.


인간이 아무리 수련과 연습을 해도 그 죄성을 다스리려는 주체는 자기 자신일 뿐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는 없다.


자신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자신을 그리스도께 내어 드려야한다.


거듭난 자는 자신이 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옛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며, 자신의 삶의 주인은 더 이상 자신이 아니다.


성도는 내주하시는 성령이 주장하시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야만 그리스도인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성도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이 될 때, 윤리와 도덕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성도의 삶


윤리 도덕에서 자유하는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대위임령을 수행하는 삶이다.


아담의 좌악으로부터 해방된 성도는 다시 에덴으로 돌아가서 처음 아담에게 주어졌던 명령을 다시 실행하여야 할 의무가 없다.


성도에게 주어진 안식은, 에덴에서의 요구가 성취됨으로 인해서 주어진 것이다.


성도는 타락 이전의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에덴에서의 과제가 완성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선취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에덴에서의 요구는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에덴에서의 요구가 성취된 안식의 나라이다.


그리스도는 안식의 주인으로서, 성도에게 안식이라는 쉼을 주어진다.


성도가 누리는 안식은 에덴에서의 요구에 대한 성취로 인한 것이기에, 에덴에서 아담이 받은 명령을 다시 실행하는 삶은 안식의 삶이 아니다.


성도는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심으로서 이루신 안식을 선포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인간은 죄성을 가진 육신을 입고 있기에 육신으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아담이 받았던 명령을 수행 할 수가 없다.


창세기1장 28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은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종식되었으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


아담이 처음 받았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육신의 소육을 쫓는 사단의 종을 생육하고 번성시킬 수 밖에 없는 체질로의 변화로 인하여, 더 이상 실천이 불가능한 것이다.


성도라 할지라도 죄성을 가지고있는 육신을 입기에, 불가능한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은 문화명령이 될 수 없다.


육신이 된 인간에게, 문화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와같이,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문화변혁운동이 성도의 과제가 될 수도 없다.


아담의 후손들이 마음으로 생각하고 계획하는 모든 것은 항상 악할 뿐이기에, 세상에는 악이 가득할 수 밖에 없으며, 이 땅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을 쌓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자녀를 많이 낳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노아 홍수와 더불어, 노아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인하여 물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듯이,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의 선행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심령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은 진노의 자녀들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러 모으는 생육의 방법이다.


문화 명령을 실행하는 삶은 자신의 죄성을 가리는 또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자신이 본질적인 진노의 자녀임을 외면하고, 문화변혁 운동을 하거나,  도덕을 쫓아가는 사람들은, 아무리 문화를 변화시키고 도덕과 선행으로 자신을 포장한다고 하더라도,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결국에는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모르고, 자신들이 본질적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더 나은 복지 사회와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하나님을 배제하고 사단의 종노릇하는 현대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종국에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심판을 받게 되어있다.


성도의 참된 신앙생활은, 행동 방식의 개선을 넘어서, 본질적인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게 해주는 복음을 전하는 일로 귀결되어야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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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 2018. 12. 30. 17:24

아담은 언제 죽었는가?


김원호(dent4834@hanmail.net)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에베소서 2장 1-10절)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이 허물과 죄로 인하여 이미 죽은 존재임을 말하고있다.


그렇다면 에베소 사람들이 모두 다 범죄를 행하였다는 것인가?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을 이미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에베소 사람들이 죄를 범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론적으로 죽어있던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의문을 생길 수밖에 없다.


에베소 사람들은 분명히 살아있는 존재들이다.


그런데도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을 죽은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이는 바울이 말하는 생명에 대한 관점이 일반 상식적인 관점과 다른 것임을 보여준다.


참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사람은 실상은 죽어있는 존재이다.


인간이 의존하는 육신에는 생명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생명이 없는 육신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서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찾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존재와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는 분명 잘못된 상태에 있음에도, 인간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하기를 원치 않고, 그냥 육신의 소욕을 쫓아서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살리셨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죽었던 것이며,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는 것은 인간이 처음 아담과 함께 죽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럼 아담은 언제 죽었는가?


인간은 아담이 늙어 수명이 다 되어 죽었을 때 같이 죽은 것이 아니다.


인간은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하였을 때 죽은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아담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부여된 것은 안식의 성취라는 목표 안에서 완성이 된다.


하나님께서 6일간의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을 취하셨듯이, 아담은 자신에게 주어진 선악과 금령과 통치 명령을 수행함으로서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어야만 했었다.


아담의 불순종은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안식이라는 목표가 상실되었기에, 죽음에 이른 것이다.


에덴 바깥에 있는 모든 인간은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안식이라는 목표가 상실되어있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존재이다.


영원한 안식이라는 목표가 상실된 인간은, 나쁜 짓을 하기 이전에 아담 안에서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이미 목표가 상실된 죽은 존재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아담은 범죄한 날 죽지 않고 수백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아담은 수백년을 살다가 죽었지만, 그는 처음 주어졌던 종말론적 안식을 성취하지 못함으로 죽은 것이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날이 당일이 아닌, 상황을 뜻하는 말이라고 말하면서, 아담이 수백년을 더 살다가 죽었지만, 아담의 육신이 죽은 날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아담이 범죄한 날과 같은 날로 보기도한다.


범죄한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나 에덴 바깥에서 살아갔던 시간을 아담이 살아있던 시간이었다고 말한다면, 육신을 입은 모든 인간도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이렇게되면 에덴 바깥에서의 아담과 우리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이기에, 에베소 교인들을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이들이라는 바울의 말은 틀린 말이 된다.


이러한 혼란은 살아있다는 생명에 대한 규정이 잘못된 데서 온 것이다.


참된 생명은 영원한 안식과 연계되어 규정되어야한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에, 하나님과의 분리는 생명의 상실인 죽음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5:26)”


그리스도의 생명은 순종을 통하여 영원한 안식을 성취하심 가운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생명되신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생명이 없는 자들을 위함이니, 이는 아담 안에서 죽은 이들은 생명이 없는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가식적인 유대인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시면서, 유대인들이 실상은 죽은 존재임을 말씀하신다.


에덴 바깥에서의 아담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육신은 살아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은 자라고 말해야할 것이다.


바빙크는 아담이 범죄한 날 죽지 않고 오랜 시간을 더 살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이러한 언급은 영적인 생명과 육적인 생명을 동일시하는 혼란을 가져온다.


선악과를 먹은 날 아담의 육적인 생명은 보존될 수 있었지만, 영적인 생명은 상실되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은 일차적으로는 영적인 생명이며, 육적인 생명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주요 관심사는 생명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생명을 위한 것이었다.


바빙크가 부차적인 육적인 생명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육신이 살아있었기에 하와의 후손을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원시복음이 이루어질 수 있었음을 말하고자한 것이다.


바빙크는 육적인 생명을 영적인 생명과 일치시킴으로서 혼란을 야기한 것이다.


둘째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되심은, 처음 아담 안에 있었던 생명의 상실에 대한 회복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적인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바빙크가 말하는 범죄한 아담이 에덴 바깥에서 살았던 삶의 기간에 생명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근거로, 인간이 살아있는 존재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화란개혁주의자들이 종교 개혁자들과는 달리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노예 의지에 대하여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은, 바빙크의 생명에 대한 언급을 적용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바빙크가 말하고자했던 것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일정 기간 육신의 삶을 삶으로서,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한 구속이 가능하였던 것에 대한 것이었다.


죽은 자가 후손을 낳는다는 것은 자연법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지만, 죽은 자가 죽은 후손을 낳는 것은 생명이신 하나님의 법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범죄한 아담이 에덴의 바깥에서 죽은 자로서 후손을 낳으며 살아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죽은 자의 후손으로서 죽은 후손을 낳으며, 생명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날 아담과 더불어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죽었다고 보아야지만,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바울의 말이 적용될 수 있다.


인간은 사실상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생명이 있던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이 생명이 없는 육신natural body으로 체질적으로 변화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그들이 육신이 됨으로 하나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으시리라고 말씀하셨다(창 6:3).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아담이 창조 당시에 지음받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이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된 육적인 몸natural body이 되었다는 것이다.


영적인 몸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강령에 따라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으면서 살아왔지만, 육신이 된 인간은 하나님의 강령과 관계없이 자신이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께로부터의 공급과 관계없이 스스로 육신의 소욕을 쫓아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 즉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하늘은, 육신의 눈에 보이는 하늘이 아니라, 육신으로는 보이지 않는 천상의 세계upper-register로서의 하늘이다.


영적인 몸으로 창조된 아담은 에덴에서 천상의 세계를 공유하였으며, 동산에서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에덴은 영적인 몸을 지닌 아담이 하나님의 왕권으로, 제사장, 선지자로서, 피조물에 대한 영적인 권위를 행사하였던 곳이다.


동산에서의 모든 생물들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부여하신 영적인 권위에 복종함으로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있었다.


창세기 1장 28절은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아담에게 위임시키심으로서, 아담이 피조 세계를 어떻게 다스려야하는가를 분명하게 명시한 통치명령, 혹은 지배명령임을 알 수 있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의 해석과 같이, 창세기 1장 28절을 문화명령이나 창조명령으로 해석한다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더불어 성도들의 신앙의 정체성에 대한 전반적인 해석이 달라져야만 한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명령하는 다스림의 대상  가운데에는 "모든 생물"이 포함되어있다.


창세기 3장 1절의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한 자인 뱀은 창세기 1장 28절에서 아담에게 다스리라고 명하신 생물(창 1:28)들 가운데 한 가지였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생물”과 창세기 3장 1절에서의 “짐승”은 동일한 어원을 가진 같은 히브리어 “חַי chay: 살아있는, 생존하는”로서 아담은 분명 왕의 자격으로 간교한 뱀을 다스리라고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것이다.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의 꼬임을 받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이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대적하는 반역자와 더이상 함께 하실 수가 없으셨다.


에덴에서의 아담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함으로서 생명이 있는 영적인 몸을 지닌 자였지만, 범죄하여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생명이 상실된 육신을 지닌 자가 되었다.


이러한 몸의 변화는 생명의 상실, 즉 죽음이었기에, 아담은 범죄한 날 죽은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생명이 있는 영적인 몸은 사탄을 다스리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은 다스려야할 영적 존재에게 다스림을 받게된 것이다.


아담의 영적인 몸은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을 받는 살아있는 몸이었지만, 육신은 그 소욕을 쫓아 사탄의 다스림을 받는 죽은 몸을 뜻하며, 바울은 이에 대하여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허물과 죄로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육신이 되었기에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음으로 인간은 살아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생명이 있는 영적인 몸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종말론적인 안식의 축복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지만,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는 인생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가 없기에, 종말론적인 안식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에덴을 창설하시고 그 곳에 아담을 살게하신 것은 일정 기간의 순종을 통하여 종말론적인 안식에 이르도록하시기 위함이었다.


에덴에서 종말론적인 안식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두 가지 명령을 실행하여야만 했다.


그 두 가지는 선악과 금령과 통치 명령이다.


선악과 금령이 아담에게 최소한의 범하지 말아야 할 수동적 순종을 요구하는 명령이었다면, 창세기 1장 28절의 통치 명령은 종말론적인 안식의 축복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수행하여야 할 능동적 순종을 요구하는 명령이었다.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순종은 아담의 선악과 범죄로 인한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이라는,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수동적 순종을 종결시키신 것과, 아담에게 주어졌던 능동적 순종으로서의 통치 명령을 율법의 요구를 성취시키심으로 모두 완성시키신 것이다.


성도가 전가받는 그리스도의 순종은, 십자가에서 속죄 사역을 감당하신 수동적 순종위 의와 율법의 마침이 되심으로서 이루신 능동적 순종의 의를 전가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의가 성도에게 전가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다.


성도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상실된 생명을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되찾은 것이다.


하지만 비록 성도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다하더라도 아직 체질적으로는 죄성을 가진 육신에서 자유할 수가 없다.


성도에게 주어진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었다면, 성도는 즉각적으로 죄성을 가진 육신에서 벗어나야하지만, 이는 종말론적 약속일 뿐 아직 성취된 것은 아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즉각적으로 인간이 죄성을 가진 육신이 되었지만, 육신을 입은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새생명을 입은 변화된 영적인 몸을 입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모든 인간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담으로 인하여 변화된 죄성을 가진 육신의 유전적 형질이 전가됨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달리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유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속성으로 말미암아, 사회의 집단적 악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개혁주의에서는 하나님의 강령decree에 의해서 인간이 죄인으로 규정됨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담은 범죄로 인하여 이미 체질에 있어서, 땅이 저주를 받은 것과 같이, 영적인 몸spiritual body에서 육적인 몸natural body으로 변화된 것이다.


영적인 몸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 천상의 세계upper-register를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지만, 육신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음으로 인해서, 천상의 세계와 분리된 체질적인 한계를 가진 몸이 된 것이다.


비록 성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존재가 되었지만, 아직 체질적으로는 죄성을 가진 육신을 입고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본다면, 인간의 죄성이 변화된 체질의 유전에 의한 것이라는 어거스틴의 설명도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시기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음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바로 죽음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제7일에 안식을 취하였듯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에덴에서의 순종을 통하여 종말론적 안식에 들어갔어야만 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음은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에게도 주어진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제7일에 안식을 취하신 것과 같이, 인간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안식에 들어가야지만,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생명이 완성되는 것이다.


순종을 통한 영원한 안식이라는 목표가 상실된 인간은 죽은 인간이다.


아담은 불순종하였을 때 이미 종말론적 안식이라는 목표가 상실된 상태이기에, 죽은 존재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명있는 자라고 주장하였을 지라도,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율법을 성취할 수 없는 죽은 자였던 것이다.


생명을 종말론적 안식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볼 때 종말론적 안식이라는 방향성과 이를 성취할 믕력이 상실된 자는 모두 죽은 자이다.


아담의 죄를 전가받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있는 모든 인간은,  종말론적 안식에 들어갈 능력이 상실되었기에, 파멸의 길로 향할 수 밖에 없다.


타락 전 아담에게 있었던 생명은 종말론적 안식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안식의 주인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가받은 성도는, 다시 얻은 생명을 안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생명이 없는 인간의 행위는, 인간이 보기에는 선한 것 같아도, 종말론적 안식에 이를 수 없기에, 하나님보시기에는 악할 뿐이다.


생명이 없는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제는, 자신들이 안식에 이를 수 없는 죽어있는 상태라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하며,  인정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벗어날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때,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하는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안식이라는 생명의 선물을 받으려고 손을 뻗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은 자신이 이미 아담 안에서 죽어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는 영원한 안식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간의 힘으로는 영원한 안식에 이를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영원한 안식으로의 초대이기에, 그리스도가 생명이 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의 결국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었다.


율법 앞에서 이스라엘이 영원한 안식에 이를 수 없는 사실상 죽은 존재임이 증명되었듯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자연법 앞에서 영원한 안식에 이를 수 없는 죽은 존재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율법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유지하기보다는 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였듯이, 하나님의 자연법 앞에 모든 인간은 죽은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이 패망하고나서야 그리스도의 구속의 손길이 다가왔듯이, 인간은 자연법 앞에서 처참하게 죽어있는 모습이 드러남으로서 비로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안식에 다가 갈 수 있는 것이다.


성도가 경험하는 다양한 역경들 가운데에는, 아직 죄성을 가진 육신이 고발되고 그 가운데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담겨있음을 생각해보아야한다.


참된 생명은 그리스도의 안식에 들어갈 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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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2018. 12. 30. 16:12

신칼빈주의에서 보는 “이미 그러나 아직”으로서의 세상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종종 “이미 그러나 아직”의 개념을 사용하곤 한다.


통상적으로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은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구원받은 성도가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함에 참여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참여된 것은 아니라는 의미에도 적용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와 성도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이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에게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임하였고,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한 분별과 과제가 주어진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대한 관점이 제대로 정립되어야한다.


성도는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킬 것인지, 아니면 이 세상에 대하여 배타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관점이 정립되어야한다.


신칼빈주의에서는 이 세상 자체를, 교회와 마찬가지로, 이미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하나의 영역으로 보고있다.


이와는 반대로 개혁주의 두 왕국two kingdom 개념에서는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의 구속적 영역이 아닌, 바벨론과 같이 심판의 대상이 되는 곳으로 보고있다.


개혁주의 두 왕국two kingdom 관점에서보는 성도는, 바벨론 포로로 살아가는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과는 하나가 될 수 없는 배타적 존재인 것이다.


개혁주의 두 왕국two kingdom 관점에서 보는 이 세상은 개혁시켜야 할 곳이지만, 유대인들이 살아가던 바벨론과 마찬가지로 임시적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개혁주의 두 왕국two kingdom 관점에서는 이 세상에 대하여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기보다는, 이 세상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까지, 이 땅에서 한시적인 것이라는데 제한을 둔다.


한시적이라는 개념에는 불연속적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있다.


신칼빈주의에서는 이 세상이 새 하늘과 새 땅과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며, 신칼빈주의에서 이 세상을 변혁시켜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한 나라one kingdom에서의 “이미 그러나 아직”


개혁주의 두 왕국two kingdom 관점에서는, 성도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 대하여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여야하지만, 이 세상의 문화를 천국보존을 위한 변혁의 대상이라는 영원성의 관점에서 보게되면 안된다는 것이다.


신칼빈주의에서는 “이미 그러나 아직”의 개념을 세상에도 적용하지만, 개혁주의 두 왕국 관점에서는 오직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에만 적용을 시킨다.


“이미 그러나 아직”의 개념을 이 세상에 적용한다면, 세상 자체은 구속받은 하나님 나라의 영역이 된다.


하지만 “이미 그러나 아직”은 이 세상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속성에 관한 것일 뿐, 이 세상의 속성에 관한 것은 아니다.


세상은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와 대립 관계에 있는 세상일 뿐이다.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대립관계는 이원론의 근거가 되지만, 이원론적 사상을 배격하는 신칼빈주의 입장에서 보는 이 세상은 구속을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의 한 부분일 뿐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나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도 신칼빈주의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하나의 하나님 나라로 보고있다.


미셔널 처치, 즉 선교적 교회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와 알버트 월터스의 기독교 세계관을 하나로 역어서 만들어낸 WCC의 교회론이다.


칼빈 신학교의 마이클 고힌은 이를 역어서 알버트 월터스와 함께 “창조 타락 구속”의 개정판을 쓰게 된 것이다.


알버트 월터스는 개정판 후기에서 톰 라이트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고백하고있다.


알버트의 세계관은 톰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지옥의 개념을 배제할 뿐만 아니라, 죽은 성도가 천상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배제한다.


알버트는 톰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죽은 성도가 잠들었을 뿐이라고 보고있다.


이는 저 세상에서의 천국을 배제하는 만큼 저 세상에서의 지옥을 배제하는 것이다.


신칼빈주의 입장에서보는 이 세상에는 지옥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 세상 자체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를 입고, 이 세상은 새 하늘과 새 땅과 연속선 상에 있기 때문에, 지옥의 개념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예수님의 재림 시에 있게 될 최후의 심판에서는, 알곡과 가라지가 나뉘어지며, 양과 염소가 구별되며, 두 부류의 사람들이 전혀 다른 세계로 양분되어야 할 기다림이 있다.


이 땅에 임한 구속적 하나님 나라는 거룩의 속성을 가지고있어야한다.


거룩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보혈을 덧입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개혁주의 두 왕국 개념에서 보는 이 세상은 거룩에 참여될 수 없기에, 이 땅에 임할 구속적 하나님 나라와 불연속성에 있지만, 신칼빈주의 입장에서보는 이 세상은 이미 거룩하기에, 구속적 하나님 나라와 연속선상에 있다.


이 세상이 구속적 하나님 나라와 연속선상에 있을 경우, 지옥에 대한 해석은 막연해질 수밖에 없으며, 톰 라이트가 말하는 쓰레기 소각장과 같은 상징적인 게헨나의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알버트는 “창조 타락 구속” 개정판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하여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있다.


존 스토트는 영혼소멸설을 주장하기도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지옥에 대하여 말하고있다.


아담과 함께 죽은 이 세상


지옥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된 곳이다.


아담은 범죄한 후에 육신이 됨으로서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거하지 않으셨다(창 6:3)


아담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에 참여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담은 창조 세계에 대하여 왕노릇하였지만, 이 세상은 아담의 왕권으로 인하여,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거룩함이 상실되었다.


처음 창조된 하늘과 땅은 천상의 세계를 공유할 수 있었지만, 아담의 타락 이후에 피조 세계는 육신이 된 아담과 마찬가지로 천상의 세계와 단절이 되었다.


아담이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죽어 육신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아담 안에서 처음 창조의 거룩성을 상실하였다.


비록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가 거룩함에 참여하였지만, 아직 죽은 육신을 입고 있듯이, 이 세상은 아직 죽어있는 상태이다.


태초에 주께서 기초를 두시고 손으로 지으신 하늘도 멸망하고 다 옷과 같이 낡아지지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는 하늘과 땅이 의복을 갈아입듯이 변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히 1:10-12).


새 하늘과 새 땅은 보존되어 깨끗해지기보다는, 의복을 갈아입듯이 교체되는 것이다.


성도도 마찬가지로 죽은 육신natural body를 벗어버리고 영적인 몸spiritual body를 입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성도가 거룩함에 참여되었어도, 피조 세계는 성도와 함께 거룩하게된 곳이 아니라, 갈아입을 대상으로서의 한시적 존재만 허락되었을 뿐이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심판을 받고 소멸될 대상이다.


이 세상이 새 하늘과 새 땅과 불연속선상에 있는 심판의 대상이 되고 거룩함이 사라진다면 지옥이 될 수밖에 없다.


“이미 그러나 아직”을 세상에 적용한다면 오직 심판에 대한 것이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심판을 받았지만, 아직 완전한 심판을 받은 것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도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지만,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생명되신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신 곳에는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다면, 이 세상은 지옥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이미 그러나 아직”은 오직 이 세상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만 적용될 뿐 세상에 적용될 수는 없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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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가교리 2018. 8. 31. 12:39

삼중 전가란 무엇인가?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전가 교리는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되었다는 내용으로만 구성되어있지 않다.


전가는 의뿐만이 아니라 죄도 전가된다.


이미 모든 인류는 아담의 죄가 전가되어 죄인이 되었다.


인간이 죄인이 된 것은 아담 언약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것이다.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규정된 인간에게 구원을 위해서는,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으로 규정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택한 자의 죄를 전가받아, 택한 자의 죄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의 전가를 통하여 신자의 죽음을 대신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속죄 사역은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한 것이 아니다.


만약에 모든 사람의 죄가 전가되었다면, 궁극적으로 복음은 모든 사람의 구속을 위한 만인구원론으로 귀결된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셨으며, 그리스도의 의는 신자에게 전가됨으로서 신자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는 모든 사람이나 모든 피조물에 전가된 것이 아니라, 택한 자에게만 전가되었다.


만인 구원론이나 우주적 교회론은 그리스도의 의가 모두에게 전가되었다고 보는데서 나온 개념이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규정된 것은 그리스도의 새언약을 근거로 한 것이다.


전가는 이와 같이 3중 구조로 되어있다.


이에 대하여 존 페스코는 다름과 같이 말한다.



택한 자의 구속 과정에서의 삼중 전가

threefold imputation in the course of the redemption of the elect.


첫번째,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처음 죄를 모든 인간에게 전가시키셨다.

First, God imputes Adam’s first sin to all human beings.


두번째, 택한 자의 구속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의 죄를 그리스도께 전가시키셨다.

Second, in the redemption of the elect, He imputes the sins of the elect to Christ.


세번째,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 혹은 그의 순종하심을 택한 자에게 전가시키셨다.

And third, He imputes Christ’s righteousness, or His obedience, to the elect.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를 예로들면: ‘그들-아담과 이브-은 온 인류의 근원이었으므로 이 죄의 허물이 전가되었으며, 죄 안에서 동일한 죽음과 부패한 성질이 보통 생육법으로 태어나는 그들의 모든 후손에게 전달되었다’(6-3)

The Westminster Confession (1647), for example, states: ‘They,’ Adam and Eve, ‘being the root of all mankind, the guilt of this sin was imputed; and the same death in sin, and corrupted nature, conveyed to all their posterity descending from them by ordinary generation’ (VI.iii).


그리고 역으로, 칭의 교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효과 있게 부르신 사람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게 하셨는데, 이는 그들 안에 의를 주입하심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또 그들의 인격을 의롭다고 인정하며 받아들임으로써이고, 그들 안에 이루어진 어떤 것이나 그들로 말미암아 성취된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다. 또한, 신앙 자체나 믿는 행위나 그 밖에 어떤 복음적인 순종을 그들의 의로 그들에게 전가하심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만족을 그들에게 전가시킴으로써이며, 그들이 신앙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의지함으로써이다. 그 신앙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다’(11-1)

And conversely, in its explanation of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the Confession states, ‘Those whom God effectually calleth, he also freely justifieth: not by infusing righteousness into them, but by pardoning their sins, and by accounting and accepting their persons as righteous; not for anything wrought in them, or done by them … but by imputing the obedience and satisfaction of Christ unto them, they receiving and resting on him and his righteousness, by faith’ (XI.i).


(Death in Adam, Life in Christ, J. V. Fesko, p18)

posted by Wonho Kim
:
전가교리 2018. 8. 31. 11:51

전가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What does the verb to impute mean?


기본적인 정의는 무엇을 다른 이에게 양도하는 것이다.

A basic definition is, to assign something to another.


거래 계정에 있어서, 누군가가 신용이나 빚을 다른 계정에 전가하거나 양도하는 것이다.

In accounting, someone can impute or assign a credit or debit to an account.


사회적 관계성에 있어서는, 누군가가 (자신의) 잘못된 동기를 다른 이의 행동에 (책임을) 전가하거나 부여하는 것이다.

In social interaction, someone can impute or assign false motives to someone’s actions.


신학적 의미에 있어서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전가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어떻게 양도하였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어왔다.

In theological terms, to impute has historically been a term employed to explain how God assigns guilt,


예를 들어서, 레위기 17장 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막에서 요구되는 희생을 드리지 않는 사람에게 피흘리는 죄를 전가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for example. In Leviticus 17:4, we read of the Lord imputing bloodguilt to the man who does not bring the required sacrifice to the tabernacle.


예전의 성경 번역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의의 상태, 즉 그들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켰다고 인정하거나 신뢰를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에게 의롭도록 전가되었다’(롬 4:22; 킹제임스버전)

In older translations of the Bible, we read of God assigning or crediting a person with the status of righteous, that is, they have fulfilled the requirements of the law: ‘And therefore it was imputed to him for righteousness’ (Rom. 4:22; kjv).


(출처; Death in Adam, Life in Christ, J. V. Fesko,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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