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교한 뱀'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20.01.05 :: 하나님은 들짐승을 간교하게 지으셨는가?
창조 2020. 1. 5. 22:43

하나님은 들짐승을 간교하게 지으셨는가?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들짐승이 왜 간교한가?


창세기3장 1절에서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라고 기록하고있다.


뱀이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들짐승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어느 정도 간교하다는 뜻을 내포하고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들짐승들을 간교하게 지으셨다는 말인가?


간교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악의에 찬 슬기"로 긍정적인 지혜로움보다는 부정적인 의도가 내포되어있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지으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악의가 담겨있는 간교하다는 언어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있다.


특히나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했던 뱀의 역할은 간교함이라는 부정적인 속성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하나님께서 뱀을 간교하게 지으셨기에 결과적으로 아담이 타락할 수밖에 없었던것이 아니냐는 혼란스러움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짐승을 지혜롭게 지으셨지 결코 간교하게 지으시지는 않으셨다.


그렇다면 원래는 간교하게 지으시지 않았는데 아담보다도 먼저 타락하여 간교하게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여기서 들짐승이 왜 간교한 가에 대해서 주목해보고자한다.


들짐승은 말 그대로 들판에 사는 짐승이다.


들판이 의미하는 바는 확트인 벌판으로서 대부분 인적이 드문 야외나 성벽 바깥의 교외 지역을 뜻한다.


들짐승이 사는 들판은 산에 세워진 동산과는 대비되는 곳이다.


산에 세워진 에덴 동산은 산에 세워진 성전으로서 예루살렘과 유사하게 성전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은 바깥 뜰과 명확히 구분되었던 이방인이 들어올 수 없는 거룩한 곳이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동방에 창설하신 에덴 동산은 거룩한 성전으로서 이방인이 머무를 수 있는 바깥뜰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곳이었다.


에덴 동산 바깥의 들판은 성전으로서의 거룩함에 참여되지는 않았지만 에덴의 확장을 위해서 남겨진 구분되는 곳이었다.


에덴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으로서, 에덴에서 아담은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직책을 감당하였으며,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에 선포하고 실행하는 직책을 맡았다.


에덴에 속하여있는 모든 짐승은 창조 목적에 적합한 지혜를 가지고 아담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만 했다.


아담은 에덴 바깥의 모든 지역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종속시키기 위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야했지만, 뱀이 하와를 유혹하였던 당시는 아직 에덴 바깥에 대한 통치를 온전하게 실행시키지는 못하고있었다.


아담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였던 에덴 바깥의 들판에는 아직 아담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며 이곳에서는 사탄의 세력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있었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창세기 1장 28절의 통치 명령은 단순한 통치 영역의 확장이 아니라 에덴 바깥의 동물들을 지배하고있었던 사단의 세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에덴 바깥의 들판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있었던 곳이었기에, 이러한 들판에서 살고있었던 짐승, 즉 들짐승들은 사단에게 종속되어서 간교한 속성을 가지고되었던 것이다.


말씀을 받지 않은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말씀을 맡은 아담의 통치가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에덴 바깥의 들판에서 들짐승들은 사단의 지배 아래에서 간교한 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사단은 분명 하나님이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으셨던 창조 세계에 들어와서 지혜로운 들짐승들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공략하였기에, 들판에 사는 이러한 짐승들은 사단의 영향으로 간교해 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창세기 3장 1절에 들짐승을 사람으로 대입해보면 "누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 중에 가장 간교한 자이니라"라는 문구가 형성된다. 


이럴 경우 하나님께서는 간교한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좋은 사람을 지으셨지만 (후에 사탄의 영향을 받아) 가장 간교한 사람이 되었다는 해석을 할 수 있다.


간교함에 내포되어있는 악은 하나님의 지으심으로부터 기인된 것이 아니라 사탄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에덴 바깥의 들판으로서의 광야


들짐승이 살던 에덴 바깥의 들판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의  광야에 적용해 볼 수 있다.


광야는 적막하거나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서 일종의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땅이다.


에덴 바깥의 들판은 동산을 적신 강이 둘러 흐르면서 동산의 생명력을 공급받아야만 했는데 동산이 폐쇄되면서 주변의 땅들은 더욱 황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에덴에서 하와를 유혹하였던 뱀은 광야의 승리자로 남게되며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의 후손들에게 절대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에덴 바깥은 성전의 바깥을 뜻하며 성전이 없는 모든 곳은 사탄이 지배하는 광야가 되었다.


광야에서의 인간 문명에서 공통적으로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뱀을 미화시킨 용의 모양이다.


역사 속의 용은 전혀 동떨어진 남미의 고대 문명 속에서도 한 가운데 자리잡고있었다.


이는 용에 대한 문명의 교류없이도 아담 안에서 타락한 모든 인류는 뱀의 후손으로서 용을 섬기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문명이 발전된다고 용의 모양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도시문명 또한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용과 관련도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광야라고 할 수 없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 모든 영역은 광야라고 할 수 있다.


광야인 도시 문명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서는 뱀 같은 간교함을 쉽게 볼 수 있으며, 이들은 서로 필요에 의해서만 존재할 뿐, 사랑이 없는 광야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 곳에서는 모든 인간이 에덴의 들짐승과 같이 간교한 모습을 보일 뿐이다.


광야에 사는 짐승들은 사단의 지배하에 간교한 들짐승이 되어 하나님을 대적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도시를 건설하며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가지만 사단은 이러한 도시를 건설하는 인간들을 들짐승들과 같이 간교하게 만들어가고있다.


하나님을 떠난 도시의 인간들이 들짐승들과 같이 간교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간교하게 지으신 것이 아니라 사단의 지배 아래에서 간교해진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권에 도전하는 들판의 짐승들


에덴 주변의 들판은 사단의 영향력이 극대화 되어있었던 곳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으로서의 에덴과 대비되는 곳이었다.


에덴은 예루살렘과 달리 광야로서의 들판과 명확한 경계가 없었다.


성전으로서의 에덴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주변 들판에 사는 들짐승에게도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하나님의 통치권이 선포되어야했기에, 아담과 하와는주변 들판의 들짐승들과 명확한 경계를 두지 않고 접촉할 수 있었다.


하와에게 접근하였던 뱀은 하와를 유혹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뱀을 접한 하와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선포하고 뱀을 지배하여야 된다는 의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뱀과의 만남은 일종의 영적 전쟁이었지만,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여야 한다는 의식이 없었던 아담과 하와는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시기 위해서 아담에게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명하신다.


에덴에서 아담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땅의 모든 곳을 지배할 의무가 있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가장 큰 걸림돌은 들판에서 아담의 통치를 받지 않고 사탄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들짐승들로서, 이들은 간교하게 사단의 종노릇을 하고있었던 것이다.


사탄은 들에 사는 들짐승들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성전인 에덴을 공략하였으며,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가장 간교한 뱀을 이용하여 하와를 유혹하고 결국 아담으로하여금 범죄케함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 것이었다.


에덴에서의 아담과 하와, 그리고 에덴 바깥의 간교한 들짐승과의 싸움은 마치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이스라엘과 우상을 섬기는 주변 이방 족속들과의 싸움과 유형적 유사성을 가지고있다.


이스라엘은 결국 에덴에서의 아담과 마찬가지로 간교한 이들에게 미혹되어 우상을 섬기게됨으로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갈 수밖에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하시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롯한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없이는 사단이 지배하는 광야에서의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눈에 보이는 광야는 하나님의 은혜 바깥에 있는 이들이 어떠한 곳에서 살아가고있는지를 가시적으로 보여주고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삭과 대비되는 아브라함의 종 하갈이 나은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은혜 바깥으로 쫓겨남으로 인해서 광야에 거주하면서 활 쏘는 자가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을 공략하는 간교한 들짐승들


에덴은 안식을 준비하는 곳이었다.


아담이 뱀의 유혹을 물리치고 온전하게 순종하였더라면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고 안식에 이르는 영광을 누렸을 것이다.


하지만 불순종한 아담은 더 이상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없었기에, 안식에 이르는 길로 들어설 수 없었다.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그룹과 두루도는 불칼로 차단됨으로서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는 안식에 이를 수 없게 된 것이다.


광야는 사단이 지배하는 생명이 없는 곳이다.


에덴 바깥으로 쫓겨난 아담은 안식에 이를 수 없었었기에 구원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순종에 따른 축복과 불순종에 따른 저주를 선언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시된 순종과 불순종은 에덴에서 아담에게 정하셨던 선악과 금령의 재연이었다.


뱀을 통하여 하와를 유혹하였던 사탄은 이방 족속들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함으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게 함으로서, 에덴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공략에 성공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하였던 이방 족속들은 간교한 들짐승들과 같이 성전을 공략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마찬가지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다시 범죄한 것은 에덴에서의 아담의 실패를 재연한 것이었으며,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에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범죄한 아담에게 약속하셨던 원시 복음을 실현시키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아담 안에서 범죄한 죄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으며, 자신들이 실상 에덴을 공략했던 광야의 들짐승들과 한 가지가 되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렘 3:2)"라고 말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간교한 들짐승과 같은 아라바 사람들과 한 가지가 되었음을 고발하고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에서 경험했던 광야에서와는 달리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원했으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식탁을 경험하여야만 했다.


광야로 변하여 황폐하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을 기다려야만 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경험할 새 일을 예언하고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9)"


이는 이스라엘의 실상이 광야나 사막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사야의 외침은 광야나 사막이 되어버린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동산으로 회복시키겠다고 전한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 51:3)"


둘째 아담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처음 아담이 실패한 자리로 다시 오셔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서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신다.


회복된 에덴에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안식에 이르는 길이 완성되었다.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회복시킨 에덴은 처음 아담이 있었던 에덴을 넘어서 안식이 성취된 곳이다.


처음 아담은 간교한 들짐승을 이용한 사단의 공격에 패배하였지만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들짐승이 있는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심으로 사탄에게 승리하셨다.



간교함은 오직 사탄의 작품일 뿐이다.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은 실상 광야에 있었던 상태였다.


이들은 더 이상 자신들이 다가오는 간교한 들짐승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례 요한의 외침은 광야에서의 외침이었지만, 자신들이 광야에있는 들짐승들과 한 가지로 간교한 자라는 것을 알았기에 요한의 회개의 외침에 순응하며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세례 요한은 사단의 종으로서의 간교함을 버리고 그리스도께 나아올 것을 선포하고있다.


에덴 바깥의 들짐승들은 사탄의 영향력에 의해 간교한 들짐승이 되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광야에 있는 간교한 자들의 간교함을 없애고 이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다.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신 것은 간교함의 원천이 있는 광야에서 사탄을 대적하심으로 인간 안에 스며든 간교함을 원펀적으로 차단시키고자 함이었다.


간교함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가만히 숨어들어온 사탄이 뿌린 악이다.


하나님께서는 동물들을 보시기에 좋게 지으셨어도 간교하게 지으시지는 않으셨다.


간교한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했던 뱀은 여자의 후손에 의해서 머리가 깨짐으로서 패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창조하신 분도 아니시며, 아담의 불순종을 조장하신 분도 아니시다.


인간 안에 스며든 불순종과 간교함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몰래 숨어들어온 사탄의 작품일 뿐이다.

posted by Wonho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