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8.12.30 :: 신칼빈주의에서 보는 “이미 그러나 아직”으로서의 세상
하나님 나라 2018. 12. 30. 16:12

신칼빈주의에서 보는 “이미 그러나 아직”으로서의 세상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종종 “이미 그러나 아직”의 개념을 사용하곤 한다.


통상적으로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은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구원받은 성도가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함에 참여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참여된 것은 아니라는 의미에도 적용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와 성도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이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에게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임하였고,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한 분별과 과제가 주어진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대한 관점이 제대로 정립되어야한다.


성도는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킬 것인지, 아니면 이 세상에 대하여 배타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관점이 정립되어야한다.


신칼빈주의에서는 이 세상 자체를, 교회와 마찬가지로, 이미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하나의 영역으로 보고있다.


이와는 반대로 개혁주의 두 왕국two kingdom 개념에서는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의 구속적 영역이 아닌, 바벨론과 같이 심판의 대상이 되는 곳으로 보고있다.


개혁주의 두 왕국two kingdom 관점에서보는 성도는, 바벨론 포로로 살아가는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과는 하나가 될 수 없는 배타적 존재인 것이다.


개혁주의 두 왕국two kingdom 관점에서 보는 이 세상은 개혁시켜야 할 곳이지만, 유대인들이 살아가던 바벨론과 마찬가지로 임시적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개혁주의 두 왕국two kingdom 관점에서는 이 세상에 대하여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기보다는, 이 세상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까지, 이 땅에서 한시적인 것이라는데 제한을 둔다.


한시적이라는 개념에는 불연속적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있다.


신칼빈주의에서는 이 세상이 새 하늘과 새 땅과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며, 신칼빈주의에서 이 세상을 변혁시켜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한 나라one kingdom에서의 “이미 그러나 아직”


개혁주의 두 왕국two kingdom 관점에서는, 성도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 대하여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여야하지만, 이 세상의 문화를 천국보존을 위한 변혁의 대상이라는 영원성의 관점에서 보게되면 안된다는 것이다.


신칼빈주의에서는 “이미 그러나 아직”의 개념을 세상에도 적용하지만, 개혁주의 두 왕국 관점에서는 오직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에만 적용을 시킨다.


“이미 그러나 아직”의 개념을 이 세상에 적용한다면, 세상 자체은 구속받은 하나님 나라의 영역이 된다.


하지만 “이미 그러나 아직”은 이 세상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속성에 관한 것일 뿐, 이 세상의 속성에 관한 것은 아니다.


세상은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와 대립 관계에 있는 세상일 뿐이다.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대립관계는 이원론의 근거가 되지만, 이원론적 사상을 배격하는 신칼빈주의 입장에서 보는 이 세상은 구속을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의 한 부분일 뿐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나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도 신칼빈주의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하나의 하나님 나라로 보고있다.


미셔널 처치, 즉 선교적 교회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와 알버트 월터스의 기독교 세계관을 하나로 역어서 만들어낸 WCC의 교회론이다.


칼빈 신학교의 마이클 고힌은 이를 역어서 알버트 월터스와 함께 “창조 타락 구속”의 개정판을 쓰게 된 것이다.


알버트 월터스는 개정판 후기에서 톰 라이트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고백하고있다.


알버트의 세계관은 톰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지옥의 개념을 배제할 뿐만 아니라, 죽은 성도가 천상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배제한다.


알버트는 톰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죽은 성도가 잠들었을 뿐이라고 보고있다.


이는 저 세상에서의 천국을 배제하는 만큼 저 세상에서의 지옥을 배제하는 것이다.


신칼빈주의 입장에서보는 이 세상에는 지옥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 세상 자체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를 입고, 이 세상은 새 하늘과 새 땅과 연속선 상에 있기 때문에, 지옥의 개념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예수님의 재림 시에 있게 될 최후의 심판에서는, 알곡과 가라지가 나뉘어지며, 양과 염소가 구별되며, 두 부류의 사람들이 전혀 다른 세계로 양분되어야 할 기다림이 있다.


이 땅에 임한 구속적 하나님 나라는 거룩의 속성을 가지고있어야한다.


거룩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보혈을 덧입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개혁주의 두 왕국 개념에서 보는 이 세상은 거룩에 참여될 수 없기에, 이 땅에 임할 구속적 하나님 나라와 불연속성에 있지만, 신칼빈주의 입장에서보는 이 세상은 이미 거룩하기에, 구속적 하나님 나라와 연속선상에 있다.


이 세상이 구속적 하나님 나라와 연속선상에 있을 경우, 지옥에 대한 해석은 막연해질 수밖에 없으며, 톰 라이트가 말하는 쓰레기 소각장과 같은 상징적인 게헨나의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알버트는 “창조 타락 구속” 개정판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하여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있다.


존 스토트는 영혼소멸설을 주장하기도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지옥에 대하여 말하고있다.


아담과 함께 죽은 이 세상


지옥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된 곳이다.


아담은 범죄한 후에 육신이 됨으로서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거하지 않으셨다(창 6:3)


아담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에 참여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담은 창조 세계에 대하여 왕노릇하였지만, 이 세상은 아담의 왕권으로 인하여,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거룩함이 상실되었다.


처음 창조된 하늘과 땅은 천상의 세계를 공유할 수 있었지만, 아담의 타락 이후에 피조 세계는 육신이 된 아담과 마찬가지로 천상의 세계와 단절이 되었다.


아담이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죽어 육신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아담 안에서 처음 창조의 거룩성을 상실하였다.


비록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가 거룩함에 참여하였지만, 아직 죽은 육신을 입고 있듯이, 이 세상은 아직 죽어있는 상태이다.


태초에 주께서 기초를 두시고 손으로 지으신 하늘도 멸망하고 다 옷과 같이 낡아지지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는 하늘과 땅이 의복을 갈아입듯이 변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히 1:10-12).


새 하늘과 새 땅은 보존되어 깨끗해지기보다는, 의복을 갈아입듯이 교체되는 것이다.


성도도 마찬가지로 죽은 육신natural body를 벗어버리고 영적인 몸spiritual body를 입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성도가 거룩함에 참여되었어도, 피조 세계는 성도와 함께 거룩하게된 곳이 아니라, 갈아입을 대상으로서의 한시적 존재만 허락되었을 뿐이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심판을 받고 소멸될 대상이다.


이 세상이 새 하늘과 새 땅과 불연속선상에 있는 심판의 대상이 되고 거룩함이 사라진다면 지옥이 될 수밖에 없다.


“이미 그러나 아직”을 세상에 적용한다면 오직 심판에 대한 것이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심판을 받았지만, 아직 완전한 심판을 받은 것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도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지만,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생명되신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신 곳에는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다면, 이 세상은 지옥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이미 그러나 아직”은 오직 이 세상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만 적용될 뿐 세상에 적용될 수는 없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