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 2018. 12. 30. 17:24

아담은 언제 죽었는가?


김원호(dent4834@hanmail.net)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에베소서 2장 1-10절)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이 허물과 죄로 인하여 이미 죽은 존재임을 말하고있다.


그렇다면 에베소 사람들이 모두 다 범죄를 행하였다는 것인가?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을 이미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에베소 사람들이 죄를 범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론적으로 죽어있던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의문을 생길 수밖에 없다.


에베소 사람들은 분명히 살아있는 존재들이다.


그런데도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을 죽은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이는 바울이 말하는 생명에 대한 관점이 일반 상식적인 관점과 다른 것임을 보여준다.


참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사람은 실상은 죽어있는 존재이다.


인간이 의존하는 육신에는 생명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생명이 없는 육신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서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찾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존재와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는 분명 잘못된 상태에 있음에도, 인간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하기를 원치 않고, 그냥 육신의 소욕을 쫓아서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살리셨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죽었던 것이며,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는 것은 인간이 처음 아담과 함께 죽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럼 아담은 언제 죽었는가?


인간은 아담이 늙어 수명이 다 되어 죽었을 때 같이 죽은 것이 아니다.


인간은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하였을 때 죽은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아담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부여된 것은 안식의 성취라는 목표 안에서 완성이 된다.


하나님께서 6일간의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을 취하셨듯이, 아담은 자신에게 주어진 선악과 금령과 통치 명령을 수행함으로서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어야만 했었다.


아담의 불순종은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안식이라는 목표가 상실되었기에, 죽음에 이른 것이다.


에덴 바깥에 있는 모든 인간은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안식이라는 목표가 상실되어있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존재이다.


영원한 안식이라는 목표가 상실된 인간은, 나쁜 짓을 하기 이전에 아담 안에서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이미 목표가 상실된 죽은 존재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아담은 범죄한 날 죽지 않고 수백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아담은 수백년을 살다가 죽었지만, 그는 처음 주어졌던 종말론적 안식을 성취하지 못함으로 죽은 것이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날이 당일이 아닌, 상황을 뜻하는 말이라고 말하면서, 아담이 수백년을 더 살다가 죽었지만, 아담의 육신이 죽은 날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아담이 범죄한 날과 같은 날로 보기도한다.


범죄한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나 에덴 바깥에서 살아갔던 시간을 아담이 살아있던 시간이었다고 말한다면, 육신을 입은 모든 인간도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이렇게되면 에덴 바깥에서의 아담과 우리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이기에, 에베소 교인들을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이들이라는 바울의 말은 틀린 말이 된다.


이러한 혼란은 살아있다는 생명에 대한 규정이 잘못된 데서 온 것이다.


참된 생명은 영원한 안식과 연계되어 규정되어야한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에, 하나님과의 분리는 생명의 상실인 죽음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5:26)”


그리스도의 생명은 순종을 통하여 영원한 안식을 성취하심 가운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생명되신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생명이 없는 자들을 위함이니, 이는 아담 안에서 죽은 이들은 생명이 없는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가식적인 유대인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시면서, 유대인들이 실상은 죽은 존재임을 말씀하신다.


에덴 바깥에서의 아담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육신은 살아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은 자라고 말해야할 것이다.


바빙크는 아담이 범죄한 날 죽지 않고 오랜 시간을 더 살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이러한 언급은 영적인 생명과 육적인 생명을 동일시하는 혼란을 가져온다.


선악과를 먹은 날 아담의 육적인 생명은 보존될 수 있었지만, 영적인 생명은 상실되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은 일차적으로는 영적인 생명이며, 육적인 생명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주요 관심사는 생명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생명을 위한 것이었다.


바빙크가 부차적인 육적인 생명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육신이 살아있었기에 하와의 후손을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원시복음이 이루어질 수 있었음을 말하고자한 것이다.


바빙크는 육적인 생명을 영적인 생명과 일치시킴으로서 혼란을 야기한 것이다.


둘째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되심은, 처음 아담 안에 있었던 생명의 상실에 대한 회복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적인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바빙크가 말하는 범죄한 아담이 에덴 바깥에서 살았던 삶의 기간에 생명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근거로, 인간이 살아있는 존재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화란개혁주의자들이 종교 개혁자들과는 달리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노예 의지에 대하여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은, 바빙크의 생명에 대한 언급을 적용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바빙크가 말하고자했던 것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일정 기간 육신의 삶을 삶으로서,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한 구속이 가능하였던 것에 대한 것이었다.


죽은 자가 후손을 낳는다는 것은 자연법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지만, 죽은 자가 죽은 후손을 낳는 것은 생명이신 하나님의 법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범죄한 아담이 에덴의 바깥에서 죽은 자로서 후손을 낳으며 살아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죽은 자의 후손으로서 죽은 후손을 낳으며, 생명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날 아담과 더불어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죽었다고 보아야지만,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바울의 말이 적용될 수 있다.


인간은 사실상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생명이 있던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이 생명이 없는 육신natural body으로 체질적으로 변화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그들이 육신이 됨으로 하나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으시리라고 말씀하셨다(창 6:3).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아담이 창조 당시에 지음받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이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된 육적인 몸natural body이 되었다는 것이다.


영적인 몸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강령에 따라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으면서 살아왔지만, 육신이 된 인간은 하나님의 강령과 관계없이 자신이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께로부터의 공급과 관계없이 스스로 육신의 소욕을 쫓아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 즉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하늘은, 육신의 눈에 보이는 하늘이 아니라, 육신으로는 보이지 않는 천상의 세계upper-register로서의 하늘이다.


영적인 몸으로 창조된 아담은 에덴에서 천상의 세계를 공유하였으며, 동산에서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에덴은 영적인 몸을 지닌 아담이 하나님의 왕권으로, 제사장, 선지자로서, 피조물에 대한 영적인 권위를 행사하였던 곳이다.


동산에서의 모든 생물들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부여하신 영적인 권위에 복종함으로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있었다.


창세기 1장 28절은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아담에게 위임시키심으로서, 아담이 피조 세계를 어떻게 다스려야하는가를 분명하게 명시한 통치명령, 혹은 지배명령임을 알 수 있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의 해석과 같이, 창세기 1장 28절을 문화명령이나 창조명령으로 해석한다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더불어 성도들의 신앙의 정체성에 대한 전반적인 해석이 달라져야만 한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명령하는 다스림의 대상  가운데에는 "모든 생물"이 포함되어있다.


창세기 3장 1절의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한 자인 뱀은 창세기 1장 28절에서 아담에게 다스리라고 명하신 생물(창 1:28)들 가운데 한 가지였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생물”과 창세기 3장 1절에서의 “짐승”은 동일한 어원을 가진 같은 히브리어 “חַי chay: 살아있는, 생존하는”로서 아담은 분명 왕의 자격으로 간교한 뱀을 다스리라고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것이다.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의 꼬임을 받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이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대적하는 반역자와 더이상 함께 하실 수가 없으셨다.


에덴에서의 아담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함으로서 생명이 있는 영적인 몸을 지닌 자였지만, 범죄하여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생명이 상실된 육신을 지닌 자가 되었다.


이러한 몸의 변화는 생명의 상실, 즉 죽음이었기에, 아담은 범죄한 날 죽은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생명이 있는 영적인 몸은 사탄을 다스리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은 다스려야할 영적 존재에게 다스림을 받게된 것이다.


아담의 영적인 몸은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을 받는 살아있는 몸이었지만, 육신은 그 소욕을 쫓아 사탄의 다스림을 받는 죽은 몸을 뜻하며, 바울은 이에 대하여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허물과 죄로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육신이 되었기에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음으로 인간은 살아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생명이 있는 영적인 몸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종말론적인 안식의 축복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지만,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는 인생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가 없기에, 종말론적인 안식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에덴을 창설하시고 그 곳에 아담을 살게하신 것은 일정 기간의 순종을 통하여 종말론적인 안식에 이르도록하시기 위함이었다.


에덴에서 종말론적인 안식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두 가지 명령을 실행하여야만 했다.


그 두 가지는 선악과 금령과 통치 명령이다.


선악과 금령이 아담에게 최소한의 범하지 말아야 할 수동적 순종을 요구하는 명령이었다면, 창세기 1장 28절의 통치 명령은 종말론적인 안식의 축복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수행하여야 할 능동적 순종을 요구하는 명령이었다.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순종은 아담의 선악과 범죄로 인한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이라는,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수동적 순종을 종결시키신 것과, 아담에게 주어졌던 능동적 순종으로서의 통치 명령을 율법의 요구를 성취시키심으로 모두 완성시키신 것이다.


성도가 전가받는 그리스도의 순종은, 십자가에서 속죄 사역을 감당하신 수동적 순종위 의와 율법의 마침이 되심으로서 이루신 능동적 순종의 의를 전가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의가 성도에게 전가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다.


성도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상실된 생명을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되찾은 것이다.


하지만 비록 성도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다하더라도 아직 체질적으로는 죄성을 가진 육신에서 자유할 수가 없다.


성도에게 주어진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었다면, 성도는 즉각적으로 죄성을 가진 육신에서 벗어나야하지만, 이는 종말론적 약속일 뿐 아직 성취된 것은 아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즉각적으로 인간이 죄성을 가진 육신이 되었지만, 육신을 입은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새생명을 입은 변화된 영적인 몸을 입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모든 인간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담으로 인하여 변화된 죄성을 가진 육신의 유전적 형질이 전가됨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달리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유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속성으로 말미암아, 사회의 집단적 악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개혁주의에서는 하나님의 강령decree에 의해서 인간이 죄인으로 규정됨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담은 범죄로 인하여 이미 체질에 있어서, 땅이 저주를 받은 것과 같이, 영적인 몸spiritual body에서 육적인 몸natural body으로 변화된 것이다.


영적인 몸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 천상의 세계upper-register를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지만, 육신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음으로 인해서, 천상의 세계와 분리된 체질적인 한계를 가진 몸이 된 것이다.


비록 성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존재가 되었지만, 아직 체질적으로는 죄성을 가진 육신을 입고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본다면, 인간의 죄성이 변화된 체질의 유전에 의한 것이라는 어거스틴의 설명도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시기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음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바로 죽음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제7일에 안식을 취하였듯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에덴에서의 순종을 통하여 종말론적 안식에 들어갔어야만 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음은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에게도 주어진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제7일에 안식을 취하신 것과 같이, 인간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안식에 들어가야지만,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생명이 완성되는 것이다.


순종을 통한 영원한 안식이라는 목표가 상실된 인간은 죽은 인간이다.


아담은 불순종하였을 때 이미 종말론적 안식이라는 목표가 상실된 상태이기에, 죽은 존재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명있는 자라고 주장하였을 지라도,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율법을 성취할 수 없는 죽은 자였던 것이다.


생명을 종말론적 안식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볼 때 종말론적 안식이라는 방향성과 이를 성취할 믕력이 상실된 자는 모두 죽은 자이다.


아담의 죄를 전가받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있는 모든 인간은,  종말론적 안식에 들어갈 능력이 상실되었기에, 파멸의 길로 향할 수 밖에 없다.


타락 전 아담에게 있었던 생명은 종말론적 안식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안식의 주인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가받은 성도는, 다시 얻은 생명을 안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생명이 없는 인간의 행위는, 인간이 보기에는 선한 것 같아도, 종말론적 안식에 이를 수 없기에, 하나님보시기에는 악할 뿐이다.


생명이 없는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제는, 자신들이 안식에 이를 수 없는 죽어있는 상태라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하며,  인정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벗어날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때,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하는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안식이라는 생명의 선물을 받으려고 손을 뻗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은 자신이 이미 아담 안에서 죽어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는 영원한 안식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간의 힘으로는 영원한 안식에 이를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영원한 안식으로의 초대이기에, 그리스도가 생명이 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의 결국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었다.


율법 앞에서 이스라엘이 영원한 안식에 이를 수 없는 사실상 죽은 존재임이 증명되었듯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자연법 앞에서 영원한 안식에 이를 수 없는 죽은 존재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율법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유지하기보다는 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였듯이, 하나님의 자연법 앞에 모든 인간은 죽은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이 패망하고나서야 그리스도의 구속의 손길이 다가왔듯이, 인간은 자연법 앞에서 처참하게 죽어있는 모습이 드러남으로서 비로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안식에 다가 갈 수 있는 것이다.


성도가 경험하는 다양한 역경들 가운데에는, 아직 죄성을 가진 육신이 고발되고 그 가운데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담겨있음을 생각해보아야한다.


참된 생명은 그리스도의 안식에 들어갈 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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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2018. 12. 30. 16:12

신칼빈주의에서 보는 “이미 그러나 아직”으로서의 세상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종종 “이미 그러나 아직”의 개념을 사용하곤 한다.


통상적으로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은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구원받은 성도가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함에 참여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참여된 것은 아니라는 의미에도 적용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와 성도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이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에게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임하였고,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한 분별과 과제가 주어진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대한 관점이 제대로 정립되어야한다.


성도는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킬 것인지, 아니면 이 세상에 대하여 배타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관점이 정립되어야한다.


신칼빈주의에서는 이 세상 자체를, 교회와 마찬가지로, 이미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하나의 영역으로 보고있다.


이와는 반대로 개혁주의 두 왕국two kingdom 개념에서는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의 구속적 영역이 아닌, 바벨론과 같이 심판의 대상이 되는 곳으로 보고있다.


개혁주의 두 왕국two kingdom 관점에서보는 성도는, 바벨론 포로로 살아가는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과는 하나가 될 수 없는 배타적 존재인 것이다.


개혁주의 두 왕국two kingdom 관점에서 보는 이 세상은 개혁시켜야 할 곳이지만, 유대인들이 살아가던 바벨론과 마찬가지로 임시적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개혁주의 두 왕국two kingdom 관점에서는 이 세상에 대하여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기보다는, 이 세상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까지, 이 땅에서 한시적인 것이라는데 제한을 둔다.


한시적이라는 개념에는 불연속적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있다.


신칼빈주의에서는 이 세상이 새 하늘과 새 땅과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며, 신칼빈주의에서 이 세상을 변혁시켜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한 나라one kingdom에서의 “이미 그러나 아직”


개혁주의 두 왕국two kingdom 관점에서는, 성도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 대하여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여야하지만, 이 세상의 문화를 천국보존을 위한 변혁의 대상이라는 영원성의 관점에서 보게되면 안된다는 것이다.


신칼빈주의에서는 “이미 그러나 아직”의 개념을 세상에도 적용하지만, 개혁주의 두 왕국 관점에서는 오직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에만 적용을 시킨다.


“이미 그러나 아직”의 개념을 이 세상에 적용한다면, 세상 자체은 구속받은 하나님 나라의 영역이 된다.


하지만 “이미 그러나 아직”은 이 세상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속성에 관한 것일 뿐, 이 세상의 속성에 관한 것은 아니다.


세상은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와 대립 관계에 있는 세상일 뿐이다.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대립관계는 이원론의 근거가 되지만, 이원론적 사상을 배격하는 신칼빈주의 입장에서 보는 이 세상은 구속을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의 한 부분일 뿐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나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도 신칼빈주의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하나의 하나님 나라로 보고있다.


미셔널 처치, 즉 선교적 교회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와 알버트 월터스의 기독교 세계관을 하나로 역어서 만들어낸 WCC의 교회론이다.


칼빈 신학교의 마이클 고힌은 이를 역어서 알버트 월터스와 함께 “창조 타락 구속”의 개정판을 쓰게 된 것이다.


알버트 월터스는 개정판 후기에서 톰 라이트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고백하고있다.


알버트의 세계관은 톰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지옥의 개념을 배제할 뿐만 아니라, 죽은 성도가 천상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배제한다.


알버트는 톰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죽은 성도가 잠들었을 뿐이라고 보고있다.


이는 저 세상에서의 천국을 배제하는 만큼 저 세상에서의 지옥을 배제하는 것이다.


신칼빈주의 입장에서보는 이 세상에는 지옥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 세상 자체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를 입고, 이 세상은 새 하늘과 새 땅과 연속선 상에 있기 때문에, 지옥의 개념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예수님의 재림 시에 있게 될 최후의 심판에서는, 알곡과 가라지가 나뉘어지며, 양과 염소가 구별되며, 두 부류의 사람들이 전혀 다른 세계로 양분되어야 할 기다림이 있다.


이 땅에 임한 구속적 하나님 나라는 거룩의 속성을 가지고있어야한다.


거룩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보혈을 덧입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개혁주의 두 왕국 개념에서 보는 이 세상은 거룩에 참여될 수 없기에, 이 땅에 임할 구속적 하나님 나라와 불연속성에 있지만, 신칼빈주의 입장에서보는 이 세상은 이미 거룩하기에, 구속적 하나님 나라와 연속선상에 있다.


이 세상이 구속적 하나님 나라와 연속선상에 있을 경우, 지옥에 대한 해석은 막연해질 수밖에 없으며, 톰 라이트가 말하는 쓰레기 소각장과 같은 상징적인 게헨나의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알버트는 “창조 타락 구속” 개정판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하여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있다.


존 스토트는 영혼소멸설을 주장하기도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지옥에 대하여 말하고있다.


아담과 함께 죽은 이 세상


지옥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된 곳이다.


아담은 범죄한 후에 육신이 됨으로서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거하지 않으셨다(창 6:3)


아담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에 참여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담은 창조 세계에 대하여 왕노릇하였지만, 이 세상은 아담의 왕권으로 인하여,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거룩함이 상실되었다.


처음 창조된 하늘과 땅은 천상의 세계를 공유할 수 있었지만, 아담의 타락 이후에 피조 세계는 육신이 된 아담과 마찬가지로 천상의 세계와 단절이 되었다.


아담이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죽어 육신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아담 안에서 처음 창조의 거룩성을 상실하였다.


비록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가 거룩함에 참여하였지만, 아직 죽은 육신을 입고 있듯이, 이 세상은 아직 죽어있는 상태이다.


태초에 주께서 기초를 두시고 손으로 지으신 하늘도 멸망하고 다 옷과 같이 낡아지지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는 하늘과 땅이 의복을 갈아입듯이 변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히 1:10-12).


새 하늘과 새 땅은 보존되어 깨끗해지기보다는, 의복을 갈아입듯이 교체되는 것이다.


성도도 마찬가지로 죽은 육신natural body를 벗어버리고 영적인 몸spiritual body를 입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성도가 거룩함에 참여되었어도, 피조 세계는 성도와 함께 거룩하게된 곳이 아니라, 갈아입을 대상으로서의 한시적 존재만 허락되었을 뿐이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심판을 받고 소멸될 대상이다.


이 세상이 새 하늘과 새 땅과 불연속선상에 있는 심판의 대상이 되고 거룩함이 사라진다면 지옥이 될 수밖에 없다.


“이미 그러나 아직”을 세상에 적용한다면 오직 심판에 대한 것이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심판을 받았지만, 아직 완전한 심판을 받은 것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도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지만,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생명되신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신 곳에는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다면, 이 세상은 지옥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이미 그러나 아직”은 오직 이 세상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만 적용될 뿐 세상에 적용될 수는 없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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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가교리 2018. 8. 31. 12:39

삼중 전가란 무엇인가?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전가 교리는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되었다는 내용으로만 구성되어있지 않다.


전가는 의뿐만이 아니라 죄도 전가된다.


이미 모든 인류는 아담의 죄가 전가되어 죄인이 되었다.


인간이 죄인이 된 것은 아담 언약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것이다.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규정된 인간에게 구원을 위해서는,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으로 규정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택한 자의 죄를 전가받아, 택한 자의 죄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의 전가를 통하여 신자의 죽음을 대신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속죄 사역은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한 것이 아니다.


만약에 모든 사람의 죄가 전가되었다면, 궁극적으로 복음은 모든 사람의 구속을 위한 만인구원론으로 귀결된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셨으며, 그리스도의 의는 신자에게 전가됨으로서 신자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는 모든 사람이나 모든 피조물에 전가된 것이 아니라, 택한 자에게만 전가되었다.


만인 구원론이나 우주적 교회론은 그리스도의 의가 모두에게 전가되었다고 보는데서 나온 개념이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규정된 것은 그리스도의 새언약을 근거로 한 것이다.


전가는 이와 같이 3중 구조로 되어있다.


이에 대하여 존 페스코는 다름과 같이 말한다.



택한 자의 구속 과정에서의 삼중 전가

threefold imputation in the course of the redemption of the elect.


첫번째,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처음 죄를 모든 인간에게 전가시키셨다.

First, God imputes Adam’s first sin to all human beings.


두번째, 택한 자의 구속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의 죄를 그리스도께 전가시키셨다.

Second, in the redemption of the elect, He imputes the sins of the elect to Christ.


세번째,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 혹은 그의 순종하심을 택한 자에게 전가시키셨다.

And third, He imputes Christ’s righteousness, or His obedience, to the elect.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를 예로들면: ‘그들-아담과 이브-은 온 인류의 근원이었으므로 이 죄의 허물이 전가되었으며, 죄 안에서 동일한 죽음과 부패한 성질이 보통 생육법으로 태어나는 그들의 모든 후손에게 전달되었다’(6-3)

The Westminster Confession (1647), for example, states: ‘They,’ Adam and Eve, ‘being the root of all mankind, the guilt of this sin was imputed; and the same death in sin, and corrupted nature, conveyed to all their posterity descending from them by ordinary generation’ (VI.iii).


그리고 역으로, 칭의 교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효과 있게 부르신 사람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게 하셨는데, 이는 그들 안에 의를 주입하심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또 그들의 인격을 의롭다고 인정하며 받아들임으로써이고, 그들 안에 이루어진 어떤 것이나 그들로 말미암아 성취된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다. 또한, 신앙 자체나 믿는 행위나 그 밖에 어떤 복음적인 순종을 그들의 의로 그들에게 전가하심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만족을 그들에게 전가시킴으로써이며, 그들이 신앙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의지함으로써이다. 그 신앙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다’(11-1)

And conversely, in its explanation of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the Confession states, ‘Those whom God effectually calleth, he also freely justifieth: not by infusing righteousness into them, but by pardoning their sins, and by accounting and accepting their persons as righteous; not for anything wrought in them, or done by them … but by imputing the obedience and satisfaction of Christ unto them, they receiving and resting on him and his righteousness, by faith’ (XI.i).


(Death in Adam, Life in Christ, J. V. Fesko, p18)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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